히말라야를 걸으며 생각하고 기록하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히말라야는 매우 상징적인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버킷 리스트의 하나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마음의 안식처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꿈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작가는 조금 황당하면서도 친근한 이유 때문에 히말라야로 떠난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바로 친구 따라 강남 갔다는 얘기다.
작가는 33일 동안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네팔 최고의 휴양 도시 포카라에 머물렀으며,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리는 랑탕 계곡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트레킹했다. 누군가는 평생 꿈꿨던 일인지 모르나, 산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둘레길 걷는 걸 더 좋아하는 작가에게는 그리 설레는 일이 아니었다. 히말라야는 이름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왕 떠났으니 친구와 함께 웃고 함께 걸으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로 했다. 학교나 연구소 같은 곳에서 조용히 일하는 게 적성에 맞았지만 뜻하지 않게 PD가 되어 30여 년을 한 직장에서 일한 것처럼, 가고 싶었던 나라는 아니지만 이왕 갔으니 나름의 의의를 찾기로 했다.
이 책은 은퇴를 앞둔 한 남자의 어설픈 여행기이자 진솔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스스럼없는 삶의 기록물이다. 여행가로서의 작가는 엉성하고 서툴다. 하지만 히말라야 곳곳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는 이야기꾼으로서는 제법 훌륭하다. 누군가의 에세이를 읽는 일이 몰랐던 사람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느긋하게 한 사람을 알아 가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책을 내려놓은 당나귀의 이야기
책을 짊어진 당나귀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려서부터 판단력이나 창의성을 키우지 않으면 결국 책을 짊어진 당나귀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자신이 바로 그 ‘책을 짊어진 당나귀’라고 말한다.
당나귀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동물 중 하나이다. 몸집은 작은 데 비해 힘이 세기 때문에 히말라야에서는 매우 유용한 운송 수단이기도 하다. 방울 소리를 딸랑이며 이동하는 당나귀의 모습은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져 멋진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실상 네팔의 당나귀는 한평생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다녀야 하는 가련한 존재이다. 작가 역시 일평생 책을 읽고 철학적인 사색을 즐겼지만, 내 것이 아닌 이야기만을 짊어지고 살아온 당나귀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책이 꼭 불필요한 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에서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소위 기억할 만한 간결한 말”을 인용한다. 그건 대체로 작가가 등에 짊어지고 온 어느 철학가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인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어느 영화의 대사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느 가수의 노래 한 구절이기도 하다. 적절한 자리에 위치한 인용구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인용구들은 종종 웃음을 짓게 하면서 책 읽는 재미를 톡톡하게 한다.
스스로 책을 짊어진 당나귀라 말하는 작가는 네팔로 떠나면서 책을 한 권도 가져가지 않았다. 늘 책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먼 길을 떠나면서 가방 속에 단 한 권의 책도 품어 두지 못했을 때의 불안한 심정을. “비록 거칠더라도 자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당나귀로 변신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한 걸음 나아가며 도전을 부추긴다.
의외로운 순간을 즐기는 마음가짐
어떤 이야기가 재밌어지기 시작할 때는 그것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부터이다. 작가는 기자 시험을 준비하다가 PD가 되고,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다가 아내를 만나고, 전세 사기를 당해 고통스러울 때 일생의 자산이 되는 기회를 얻고, 승진 소식에 넥타이를 고르다가 문턱에서 좌절당한다. 심지어 고대 현자들의 고향을 찾아 터키와 그리스를 여행하고 싶었지만 얼결에 네팔을 여행하기까지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런 의외로운 순간을 즐기는 작가의 마음가짐에 있다.
작가는 말한다. “매사에 중요한 건 언제나 현재”라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한 인생에서 오늘의 즐거움을 누리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산다면 그보다 더할 나위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것으로 행복해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60년을 살아도 인생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삶은 종종 노력과 재능보다는 운과 우연으로 빚어진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이기 이전에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독서가였던 저자는 어찌 보면 무거울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굴곡을 가볍고 편안한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책장을 덮는 순간, 자연스럽게 일상을 돌아보고 앞으로도 지속될 작가의 소박한 행복을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