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향한
근원적인 분노가 가진 힘
덴마크의 신문 『인포메이션』지는 서평을 통해 “『그 여자는 화가 난다』에서의 분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분노”라고 말한 바 있다. 작중 “여자”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그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이때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다. 그의 분노는 생산적인 힘이자 창조와 변화의 원천이다. 이는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인 충동이며, 비판적 사고의 한 형태이다. 분노는 “여자”로 하여금 데카르트적 회의론자처럼 끊임없이 이전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긍정과 부정,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나아가도록 한다(김 수 라스무센).
“여자는 분노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분노하는 자신을 탓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가 분노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여자와 같은 상황에서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본문 중에서)
“여자”의 분노는 모순적이며 자기비판적이다. 분노의 확실한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회의 일반적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들을 향했다가, 다음 문장에서는 그들에게 화를 내는 “여자” 자신을 향한다. “여자”를 화나게 한 이들 역시 사회가 요구하는 사고방식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여자”는 “자신을 탓하는 자기 자신”에게 분노한다. 다시 방향을 잡은 여자의 화는 처음과 같이 개개인을 향하기보다 “일반적 사고” 그 자체를,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조장한 사회구조를 향한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통해 “여자”의 분노는 한층 객관적이고 분명해진다. 그에 따라 마야 리 랑그바드의 시 역시 점점 더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하고, 분노의 참된 대상에 가까워진다.
“여자는 병원비 때문에 아이를 입양시켰던 미숙에게 화가 난다. 아이를 입양시키지 않으면 미숙이 병원비를 지불할 수 없다는 현실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
여자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키면 병원비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제안을 공공연하게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입양 서류에 서명을 하는 미혼모들에게 아동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여자는 한국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입양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본문 중에서)
“여자”는 분노를 통해 사회적 현상에서 그 근원의 문제를 읽어낸다. 미혼모에 대한 화는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입양을 권유한 입양기관에 대한 화로, 그리고 마침내는 이러한 입양기관의 만행에 제동을 걸 만한 법적 조항의 부재를 향한다. 미혼모의 아이들이 상품화되는 현상은 미혼모 개인의 잘못도, 입양기관의 잘못도 아니라 바로 이를 용인한 제도적 문제에 서 연유했음을 “여자”는 한 흐름에 간파한다. 국가 간 입양에 대한 “여자”의 분노는 따라서 그와 관련된 총체적인 사회 문제, 즉 미혼모들에 대한 정책의 부진함, 성교육의 미비, 인종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국제사회의 불평등, 서구적인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까지 이어진다.
하나의 장시에 가까운 이 작품은 충동적이고 단순한 분노가 범사회적이고 근원적인 분노로 승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자는 화가 난다”라는 도입구는 이러한 연상과정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시는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혈연주의, 순결주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을 비참의 고통에 몰아넣었는지”(김혜순)에 대한 증언이자 고백(vidnesbyrd)이기도 하다. 저자가 총 137개의 주석을 달아가며 세심히 고증한 내용은 흡사 학술 자료와도 비슷하다. 상세하고 빈틈없는 자료 조사는 그의 분노가 지극히 사실기반적이고 정당하다는 것을, 감정에만 기대는 호소가 아니라 이성의 계몽을 촉구하는 타당한 주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종과 성별, 퀴어와 장애의 차별을 넘어?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다성악으로 터지는 목소리
작중 “여자”에게 있어 친가족과의 만남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한국의 가족과 만난 “여자”는 한국에서 입양인으로, 동성애자로, 한국인처럼 보이는 덴마크인, 혹은 덴마크어밖에 모르는 한국인으로, 가부장적인 한국의 가족구성원으로 “살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하는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동안 자국민들이 보지 못했던 한국 문화의 맹점을 향해 세련되고 통렬한 비판을 던진다.
“여자는 남편에게 여자의 존재를 끝까지 비밀로 간직하려는 언니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언니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친부모의 태도에 화가 난다. 여자는 언니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자라 말하는 친모에게 화가 난다. 친모는 언니가 네 명이나 되기 때문에 언니들보다 여자 한 명이 희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여자는 친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친가족에게 화가 난다.” (본문 중에서)
단지 그들이 먼저 “여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그들을 찾았던 것”이라는 이유로 친가족으로부터 존재가 부정당한 경험은 “여자”로 하여금 디아스포라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되찾는” 것은 “단순히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살거나 친부모를 찾”음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친부모와 언어 및 문화를 상실하고 겪는 자연스러운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심리적 해방감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의 도입부에 실린 ‘인명 갤러리’는 이러한 경험이 단지 “여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입양인을 비롯하여 갖은 ‘차별’ 속에서 정체성을 지키려 애쓰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 공유된 경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여자”의 시점에서 발화되고 있는 이 글은 그들이 쓰는 역사적 기록이며 문학적인 증언이다(김 수 라스무센). 김혜순 시인이 말하듯, 이는 인종과 성별, 퀴어와 장애를 아우르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들을 수 있는 다성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디아스포라 주체들의 내면에 갇혀 있던 화가 사회의 문제적 결함을 향할 때 이 화는 자기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생산적인 힘을 발휘한다. “여자”가 말하는 “입양인으로서의 근본적인 슬픔”은 다만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가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가정으로 입양되는 경제적 권력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의 희생양”으로서 겪는 슬픔이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세습되어온 일반적 사고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건설적인 분노이며, 약자가 더이상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동력이다. 이 책을 내려놓는 순간 분노 대신 희망이라는 감정이 샘솟는다면(『엑스프레센』지), 그것은 이 다성의 화음이 지닌 잠재성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여자는 가슴속에 솟구치는 울분을 진작에 치유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의 양모는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1년 전에 틱낫한을 만났다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라 덧붙였다. 여자가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인지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마음을 열었던 것은 바로 지금이니까.”
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