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문학의 강렬한 목소리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첫 장편소설
엄마라는 낙원을 떠나 홀로 미지의 길을 걷는 세상 모든 애니를 위한 이야기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첫 장편소설 『애니 존』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3번으로 출간된다. 서인도제도의 앤티가섬에서 나고 자란 애니가 사춘기를 통과하며 부모에게서 자립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로, 1985년 발표 당시 문단의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모았고 오늘날까지 미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이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불가사의한 요구가 더해진, 성장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아이의 혼란을 강렬한 언어와 생동감 있는 이미지로 포착했다. 엄마 아빠가 마련해준 세상 밖으로 나와 완전한 미지의 길을 향해 발을 내딛는 애니의 이야기는 앞서 출간된 『루시』의 도입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는 그런 낙원에서 살고 있었다.”
느닷없이 어른의 세계로 내몰린 아이가 목격한 실낙원의 풍경
서인도제도의 앤티가섬을 배경으로 열 살에서 열일곱 살로 성장해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첫 장편소설 『애니 존』에는 『루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엄마와 분리되기 이전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있던 시절을 의미하는 ‘낙원’의 상실은 이후 킨케이드 작품 세계를 특징짓는 모티프가 된다.
“제 글은 항상 무언가를 애도하고 있어요. 죽음 뒤에 오는 것이 아닌 한때 내 것이었던 낙원, 그 낙원의 상실을요. 저는 종종 남동생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어땠는지를 생각해요.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경 안 써요. 그때 그 낙원에서는 엄마와 내가 항상 함께였어요.” _저메이카 킨케이드
『애니 존』은 애니가 낙원에서 살던 시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낙원에서는 벌받을 짓을 해도 잠들기 전에는 어김없이 엄마의 입맞춤을 받을 수 있었다. 같은 이름을 쓰는 엄마와 같은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고, 늘 붙어다니는 “엄마 아가”였다. 그런데 애니의 키가 자라고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애니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다. 애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꼬마 숙녀 어쩌고”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옷도 따로 지어 입어야 하고, 혼자서 뭐든 잘할 수 있어야 하고, 예의범절이나 피아노를 배우러 다녀야 하는 새로운 상황이 애니에게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못하거나 잘못해서 혼나는 일이 많아지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에 명확한 구분선이 주어진다. 하지만 엄마가 바라는 대로 엄마와 구별되는 자기 자신을 갖추면 갖출수록 애니와 엄마 사이엔 해소할 길 없는 간극만 더 커져간다. 가족 대신 학교 친구들에게서 즐거움과 안정을 찾으려 해봐도 가족에게 느꼈던 실망감이 되풀이될 뿐이다. 엄마 마음에 차지 않는 아이는 친구로 삼을 수 없어서, 곁에 남는 건 죄다 엄마가 정해주는 길을 따르는 착한 아이들뿐이다.
석 달 반 내리 비가 내리는 사이 애니가 앓아누웠던 일은 작품 전체로 보아 결정적인 국면 전환을 가져온다. 애니는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한번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간다. 엄마 아빠는 마치 “신생아 다루듯” 애니를 돌보고 예전처럼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렇다 해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다. 비가 그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애니는 엄마보다도 훌쩍 커져 더이상 침대가 몸에 맞지 않는다. 애니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시는 안 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고, 동시에 내면이 텅 비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졌던, 내가 아는 세상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내면의 짐을 훌훌 털어버린 자의 단호한 결심이 아닌, 이제 막 어른이 되는 초입에 선 아이가 내딛는 고민 끝 한 걸음이다.
“불현듯 강렬한 감정이 솟구치며, ‘다시는 이것을 보지 않으리’라는 문구가 내면으로 쏟아져 들어오듯 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부풀었다. 하지만 ‘다시는 이것을 보지 않으리’라는 문구가 칼이 되어 찌른 듯 부풀었던 마음이 그만큼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부모님 발밑에 맥없이 쓰러지지 않도록 날 지탱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