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인권을 위한 새로운 상상력
반독재 민주화가 인권 운동의 최우선 과제였던 시대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민주주의가 상식인 사회, 보편적 인권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는 ‘인권의 시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에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권 문제가 계속 등장해 사회적 혼란을 빚고 있다. 미투 운동, 예멘 난민 사태,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거부,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불거진 인권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 자유의 한계를 묻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인권 발전의 길은 본래 끝이 없는 여정이다. 과거에 비해 개인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늘어났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억압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사회가 진보해도 과거부터 존재했던 인권 문제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떠오르거나 전혀 새로운 인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몰랐거나, 숨어 있었거나, 정당한 권리로 인정받지 못했던 고통과 욕구가 새롭게 발언권을 얻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동으로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까다로운 인권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는데 요즘 젊은 애들은 뭐 그리 불만이 많은지.” “이만하면 먹고살 만한데 왜 허구한 날 인권 타령인가.” “인권이 밥 먹여주나.” 얼핏 일리 있게 들리는 이런 말들은 인권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책은 인권이 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자동적으로, 순리대로,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어째서 세상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여전히 곳곳에 빈틈이 많고,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두세 개의 문제가 새로 발생하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권에 관한 관한 혁신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이를 위한 인권 공부의 길을 제시한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인권 공부의 길잡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인권과 관련해 흔히 제기되는 질문들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난민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학생 인권과 교권이 충돌한다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왜 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하는지, 인권에는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것인지 등등은 단번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민주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시민들이 해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권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인권 쟁점을 지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마음의 문을 열고 민주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곧 인권 공부의 핵심이다. 열정적으로 논쟁하되 그렇게 도출된 결론 역시 특정 시점에서 내린 ‘잠정적 결론’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모든 문제에서, 영원히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인권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인권은 기본 개념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정답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주입식 암기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보고 민주적으로 논쟁하면서 찾아가야 하는 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인권 공부의 길잡이가 되고자 한다. 홀로코스트와 현대적 인권 개념의 탄생, 기후 위기와 인권, 증오 범죄, 과거 청산 등을 다루는 이 책에 실린 63편의 글은 자국 중심, 개인 중심의 권리 개념을 뛰어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권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인권의 ‘역사적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시대별로 사람들이 유독 민감하게 느끼는 사회적 고통이 있다. 그것이 당대의 인권 감수성이다. 국왕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질렸던 시대에는 ‘법의 지배’만 확립해도 정말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다. 모든 책을 검열하던 시대에는 ‘출판의 자유’만 보장되어도 숨 쉬고 살겠다고 믿었다. 1987년 유월항쟁 때에는 ‘고문 없는 세상’과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무척 많이 등장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편한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시대별로 특유한 억압 권력이 나타나 인권 문제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인권 문제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문제가 존재하거나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인권 문제가 유난히 도드라질 뿐이다.
이것을 인권 열차에 비유해보자. 인권 열차의 기관차와 각 차량은 각각 다양한 인권 문제를 상징한다. 기관차에도 엔진이 있고 각 차량에도 엔진이 있다. 열차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도 밀어주어야 움직인다. 시대별로 기관차의 선도 구실을 하는 인권이 달라진다. 예전에 ‘법의 지배’가 인권 열차의 기관차였다면 오늘날에는 ‘페미니즘’이 기관차가 되었다. 앞으로 시대가 바뀌면 또 다른 이슈가 기관차가 되어 인권 아이콘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볼 줄 아는 눈이 인권의 역사적 감수성이다. -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84, 85쪽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는 인권의 최전선에서
미래 인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 처음으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규정하는 인권 목록이 만들어진 후,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인권의 종류는 대략 일흔 개다. 인권의 종류는 고정되지 않으며, 시대를 거듭하며 그 개수를 늘려 가고 있다. 자유권, 평등권, 참정권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부터 오늘날에는 건강권, 생명권, 환경권, 성소수자·여성·노인·이주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까지 과거에는 인권 문제로 상상할 수 없었던 권리가 인권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새로운 권리 주장이 폭발적으로 등장할수록 인권 개념도 함께 확장되는 것이다.
이 책은 다가올 미래 세계의 화두가 ‘인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인권 이야기로 가득하다. 젠더 정체성, 증오 범죄, 기후 위기, 신자유주의, 전염병, 친환경 미래 에너지 등 전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슈를 지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절박한 인권 과제로 제시한다.
《인권의 최전선》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에서는 범죄자 독방 구금, 과학 기술과 인권, 스포츠 인권, 제주어 등 토착어의 소멸, 노인의 고독 등 과거에는 인권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이슈를 인권의 영역으로 확장해 살펴본다. 법과 제도가 중심이던 인권 개념을 넘어서 우리 삶 곳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새로운 차원의 인권을 만난다.
2장 ‘녹색 인권 시대가 온다’에서는 코로나19, 미세 먼지, 녹지화, 기후 위기, 신재생 에너지, 건강과 질병 등 최근 중요한 권리로 떠오른 ‘환경권’, ‘생명권’, ‘건강권’과 관련한 인권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특히 전염병, 폭염, 폭우, 기근이 가져오는 심각한 인권 침해와 그 피해의 불평등성을 ‘지구화’와 ‘기후 위기’와 연결해 살펴본다.
3장 ‘더 깊은 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에서는 인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쉽게 체념하거나, 반인권적 표현이 늘어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인권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최근 늘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격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세계인권선언’, ‘비엔나 선언’, ‘국제인권규약’ 등 현대 인권 개념을 발전시켜 온 문헌을 살피며 인간 존엄이라는 인권의 본질적 가치를 재확인한다.
4장 ‘지구촌 인권의 미래를 묻는다’에는 미국, 독일, 폴란드, 네팔 등 저자가 세계 각지에서 목격한 다양한 인권 현장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인종 차별, 인신 매매, 총기 문제, 증오 범죄, 홀로코스트 부정, 가짜 뉴스 등 전 세계를 들썩이고 있는 인권 이슈를 한국 사회와 연결해 살펴본다.
5장 ‘인권-평화 국가로 가는 길’에서는 촛불 집회, 대통령 탄핵, 예멘 난민 사태, 코로나19까지 격랑의 시대를 헤쳐 온 한국 인권의 현주소를 인권학자의 관점으로 진단한다. 또한 우리 사회 인권 운동과 인권 교육의 역할에 대해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