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증에 얽힌 조금 특별한 기억의 흔적을 찾아서
기억에 대해 생각할 때 많은 이가 아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떠올릴 것이다. 이 책을 읽었든 안 읽었든, 마들렌의 맛과 냄새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오는 방아쇠로 작용한다는 프루스트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 《오래된 기억들의 방》의 저자 베로니카 오킨 역시 프루스트로 논의를 시작한다. 냄새가 생생한 감정적 기억의 경험을 촉발한다는 사실을 신경학의 발전보다 먼저 프루스트가 언급한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즉 감각 경험이 뇌에서 어떤 작용을 거쳐 기억이 되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이 어떻게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게 되는지가 바로 이 책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영국판 원제는 ‘The Rag and Bone Shop’으로, 다소 이해가 쉽지 않은 이 제목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시 〈서커스 동물들의 탈주〉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폐품 가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제목은 남겨진 기억들이 마치 누더기처럼 아무렇게나 쌓인 데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A Sense of Self’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자아에 초점을 맞춰 출간되었다. 한국어판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아우르는 동시에,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각자 ‘나’라는 자아를 이루는 마음의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뒤엉킨 감각의 방
―비정상 연구를 통해 정상을 이해하는 방법
이 책은 베로니카 오킨의 환자였던 이디스가 겪은 산후 정신병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아기가 바꿔치기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카그라스 증후군을 겪는 이디스를 만나게 되면서, 저자는 정신병 환자들의 청각, 후각, 시각, 촉각의 환각이 ‘진짜’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이디스의 기억은 독자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고, 자신이 정신병을 앓았음을 인지하고 지금은 병이 나아 더 이상 망상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그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기억은 진짜였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는다고 상상하는 것은 환각적 경험의 영역이다. 이는 감각 신호가 잘못 해석된 결과로, 입력되는 감각이 전혀 없는데도 외부 세계에서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가 보이기도 한다. 감각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에 대한 그 사람의 이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디스의 사례는 그동안 저자가 기억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해를 무너뜨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의과대학에서 배울 법한 지적 설명에 등을 돌리고 기억의 분류법도 무시한 채 세상의 감각 경험과 내적 느낌에만 의지해 두뇌에서 기억이 지나가는 여정을 따라가고자 했다. 19세기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비정상 연구는 정상을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듯이, 저자는 자신이 직접 만난 정신병 환자들의 사례에서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뒤엉킴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감각 경험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삶의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을 겪은 이들의 내면세계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억의 뇌과학, 감각에서 기억으로
1부는 감각이 어떻게 기억이 되는가를 살피며 정신질환이 감각과 기억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기억과 경험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를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왜 기억이 그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질까? 우리 감각과 인식은 그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기억 속에서 장소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진짜’와 ‘거짓’ 기억이 있을까? 기억의 과정이 정신질환으로 인해 흐트러지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그 질문들에 하나씩 답을 써내려가는 과정이다.
감각 없이는 기억도 없다는 사실이 지금은 상식이지만, 이를 이해하는 데는 수백 년이 걸렸다. 17세기 과학혁명 시기에 벌어진 윌리엄 몰리노와 존 로크의 흥미로운 토론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오직 촉각을 통해 사물을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이 나중에 시력을 찾게 되었을 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구체와 입방체를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실험 결과 만져보지 않고는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 마음은 백지이고, 감각 경험이 쌓여 지식과 기억을 형성한다는 사실이 이를 통해 증명되었다.
감각 신경세포는 두뇌 피질로 전달돼 해석이 이루어진다. 피질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구역이 나뉘어 ‘지도화되어’ 있다. 이렇게 전달된 감각이 향하는 뇌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해마다. 해마에서는 시간-장소-인물이라는 기억 구조를 형성한다. 이 구조가 흐트러진 인물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다. 우리가 해마의 역할을 아는 것은 기억 신경학 분야에서 유명한 환자 헨리 몰레이슨 덕분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겪은 해마 손상 때문에 일어나는 간질과 발작을 통제하기 위해 1957년 좌우 해마를 모두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의 피질에는 문제가 없었고 언어나 운동 기능은 멀쩡했지만, 수술 결과 평생 극심한 기억 손실을 겪게 되었다. 이어 ‘감정적 점화 플러그’라 불리는 편도체와 시상하부, 자율신경계를 지나 감정 피질인 뇌섬엽에 이르기까지 뇌의 구석구석이 기억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기억에서의 장소의 역할이다. 어떤 일을 기억하냐고 물을 때 우리는 보통 장소를 언급한다.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디에 있었냐고 묻기도 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존 F. 케네디가 죽던 날 집에서 그 소식을 들었던 스냅숏 같은 기억을 찬찬히 회상한다. 해마에서 가장 중요한 세포가 장소를 인식하는 세포이고 이름도 ‘장소 세포’라는 것은 의외가 아니다. 장소가 환기한 감정 기억의 마법적 공명은 우리를 어린 시절 집의 오래된 기억으로 돌아오게 하고, 과거의 어떤 거리로 보내기도 한다.
기억은 어떻게 나를 구성하는가
―트라우마가 남긴 내면의 상처
2부에서는 뇌에서 만들어진 기억이 어떻게 ‘나’라는 사람의 내면을 구성하게 되는지를 살핀다. 청소년기에서 노년기까지 나이 듦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 두뇌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결국 뇌의 기억 형성이 자아 감각을 창조하는 데 필수라는 것을 밝힌다. 모든 것은 삶의 첫 기억, 즉 자기 인식에서 시작된다. 아기는 생후 6개월이 지나면 부모가 타인임을 인식하고 18개월이 되면 스스로 인식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내면을 구성하는 첫 시작이다. 하지만 조현병 환자의 경우, 바로 이 주관성의 부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킨의 환자였던 해나는 망상에 시달리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느꼈고, 결국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에 처한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사례는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기억 네트워크는 스트레스로 가득할 것이 뻔한 사악한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형성된다. 트라우마로 남는 사건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강렬한 감정의 반복과 이해 능력의 결여가 공통되게 나타난다. 유년 시절의 파괴적인 기억과 정신병적 오해의 혼란에 사로잡혀 있던 프랜시스는 트라우마가 어떤 식으로 자기 파괴력을 지닌 괴물 같은 자기 서사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준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두뇌는 정신이상의 감각이 주는 혼란으로 뒤죽박죽인 상태다. 비체계적으로 통합된 감각 신호는 체계적인 기억 네트워크를 만들지 못하고 그 결과 세계에서 들어오는 신경 입력을 일관성 있게 처리하거나 혹은 서사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단단하고 따뜻한 신경학자가 들려주는
조금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은 단순한 과학책이 아니다. 정신의학, 신경학, 뇌과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 문학 등 학문 전반을 쉴 새 없이 아우르며 여러 층위에서 기억을 탐구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 환자들의 사례, 이제야 과학적으로 증명되기 시작한 것을 일찍이 내다본 위대한 사상가들, 신경과학의 발전보다 빠르게 기억에 대해 글을 쓴 예술가들의 경험에 뿌리를 둔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존 버거, 올리버 색스, 마르셀 프루스트, 사뮈엘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등 사상가 및 작가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기억이 인간 경험의 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기억의 비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베로니카 오킨을 읽은 이들은 공통적으로 오킨에게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를 떠올린다. 희귀한 정신질환을 유려한 필체로 풀어낸 신경학자라는 공통점은 물론이고, 글에서 드러나는 지적인 호기심, 풍부한 문학작품의 인용, 환자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보면 그들이 같은 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킨은 때로는 단호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정신과 의사로서의 소임을 이야기하고, 또 때로는 그들을 직접 옆에서 겪은 친구로서 연민을 담은 시선으로 환자들의 삶을 응원하기도 한다. 기억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사실 과학적 원리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들을 만나며 깨달은 삶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행복은 결국 자신과 세계 사이의 편안한 평형을 이룰 때 온다는 것,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 각자 내면의 집을 하나씩 가져야 한다는 것, 비록 그것이 세상 끝에 세워진 집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