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일선사화(日鮮史話)》(1928) 제2편 조선총독부 刊/조선역과 일본도자기(朝鮮役と日本陶磁器)
당시 일본 공예계에서는 금공(金工), 칠공(漆工), 직공(職工) 등이 이미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도자기에 관해서는 유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쟁 이전에는 다도(茶道)가 성행하였는데, 원래는 선림(禪林)의 놀이품이었으나 나중에는 무장(武將)들 사이의 위락용 비용으로 바뀌어 고려소(燒)나 이조 초기의 경우처럼 그와 관련된 진기한 도기를 경쟁적으로 구입하여 얼마의 값을 지불하더라도 얻고자 하였다. 러나 조선에서는 도자기 명장들이 거의 전쟁 중에 일본으로 끌려갔고, 그 후로도 아무도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으며 그 기술은 완전히 쇠퇴하여 구경할만한 제품이 전무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도자기에 관해서는 일본이 으뜸이지만 그 영예를 얻게 된 연원, 즉 임진왜란의 조선 백성의 공로를 돌이켜보면 실로 오늘날과 옛날의 감회가 없다. 다음으로 그의 사적과 그가 남긴 도자기 생산 산지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비록 이미 여러분의 친필로 서적 등에 전달하였지만, 내 생각에는 오류일 수 있다. 나는 이 일이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각종 문헌과 예산에 대한 실지 조사 등을 고려하여 이 원고를 작성하며 세상의 참고용이 되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서술한 것이 바로 오늘날 유명한 도자기 제조지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그것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해 유감일 뿐입니다.<‘서(序)’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