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사랑
애정을 무기로 엄혹한 시대에 맞서다
환상성의 경계를 뛰어넘은
17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정수
「주생전」과 「운영전」, 「최척전」과 「상사동기」는 남녀 간 애정을 소재로 당대의 사회문제를 절묘하게 반영한 애정전기소설이다. 궁녀의 금지된 사랑(「운영전」 「상사동기」), 가족애로 확장된 부부의 사랑(「최척전」) 등 작품마다 사랑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전쟁과 사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소재가 애정전기소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구현됨으로써 변화가 꼭 필요했으나 아직 꿈쩍도 않던 사회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그 과정에서 피어난 낭만이 절묘하게 그려진다.
‘조선 르네상스’의 대표 문학 장르, 애정전기소설
‘전기(傳奇)소설’은 비현실적이고 기이한(奇) 이야기를 전한다(傳)는 뜻이다. 꿈속 이야기, 귀신과 인간의 사랑 등 환상적인 설정이 특징이다. 필부필부의 삶을 다룬 이야기가 하나둘 등장하는 조선 중기는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군이 바로 ‘애정전기소설’이다. 이때부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을 법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며 환상성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애정전기소설 속 남녀 주인공은 대개 같은 소망을 안고서 인연을 맺지만 끝내 파국에 이른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 유교 윤리를 따르는 남녀관계라는 기존 틀을 탈피해 인물 간의 관계, 시대의 변화까지 종합적으로 구성해 다채로운 주제의식을 담은 소설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남녀의 욕망을 소설로 형상화하다
『주생전·운영전·최척전·상사동기』 속 남녀는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한다. 어떤 고난을 겪어도 한 사람만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애정의 대상을 바꾸기도 하고 궁궐 담을 뛰어넘어 궁녀와 금기시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심지어는 온갖 감언이설로 여자를 꾀어 하룻밤을 보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도대체 감정 조절을 하긴 하는가 싶을 정도로 사랑을 향해 돌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노라면 전란의 소용돌이나 신분의 얽매임 속에서도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고 사랑을 내세워 맞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애정전기소설 속 남녀의 사랑은 변화가 꼭 필요했으나 미동도 없던 사회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으로도 해석된다.
엇갈린 사랑의 비극, 「주생전」
「주생전」은 동아시아 전란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가로막힌 연인의 비애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이야기 초반에는 배도와 정을 나누나 선화로 변심하는 주생의 모습 때문에 이 작품을 최초의 삼각 연애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상행위에 종사하는 선비(산인山人)가 등장하는 등 신분제 질서가 흔들리는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점이나 우리 소설사에서 흔치 않은 ‘사랑의 세레나데’(사곡詞曲)를 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먹물 한 방울에서 시작된 사랑, 「운영전」
「운영전」은 궁녀와 서생의 목숨을 건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남녀의 자유연애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이전까지는 억눌렸던 인간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궁녀 운영의 김진사에 대한 용납될 수 없는 사랑, 궁녀를 대하는 안평대군의 이중성, 무녀와 하인 특의 되바라진 모습, 자유의지를 담은 궁녀의 발언 등 당대 통념이나 신분질서에 따르면 결코 허용되지 않는 면면이 「운영전」에 담겨 있다. 궁궐 담을 넘으면서까지 미친듯 내달린 사랑의 질주는 끝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인간 해방의 슬로건을 내걸며, 위험천만한 장면을 곳곳에 드러내는데 그래서인지 많은 이본이 존재함에도 이 작품을 언급한 후대의 기록이나 작자 정보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유가 사회에서 결코 드러내놓고 용납될 수 없었을 문제작인 셈이다.
전란을 이겨낸 가족애, 「최척전」
「최척전」은 전란에 휘말려 헤어졌지만 끝내 재회하는 한 가족의 고난을 담았다. 조선은 물론 일본, 베트남, 중국 요녕 등 동아시아 전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폭넓어진 당시 세계 인식을 전한다. 전쟁 때문에 생이별한 힘없는 백성이 끈끈한 부부애와 가족애, 그리고 주변의 도움으로 재회하는 과정을 짧지만 짜임새 있게 구성해 감동을 선사한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민중의 목소리로 우리 소설사에서 처음으로 ‘가족 서사’를 전할 뿐 아니라 전쟁의 비극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간 백성들의 꺾이지 않은 희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룻밤을 둘러싼 밀당, 「상사동기」
성균관 유생 김생이 어느 봄날 길에서 마주친 영영에게 반해 그와의 하룻밤 정사를 좇는 「상사동기」는 통속소설의 싹을 보여준다. 김생의 꼬임에 영영은 이리저리 방어하나 결국 두 사람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그후 김생은 ‘정이라는 것도 일에 따라 변하는 법’이라며 태도를 바꿔 유생의 삶으로 돌아간다. 요샛말로 ‘나쁜 남자’인 셈이다.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욕망하는 현실 남녀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상사동기」 때문에 이후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대중적인 애정소설이 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