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소개
서양미술사의 하늘을 수놓은 성좌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 공간
반 고흐의 상실과 결핍의 근원인 쥔데르트에서부터
예술이라는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파리를 거쳐
유토피아적 꿈의 시작점과 마침표를 찍은 아를과 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
그의 자취를 따라가다
_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문학, 사상, 예술의 위대한 거장을 찾아가는 국내 대표적 인문 기행 프로젝트인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서른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거장의 자취를 직접 밟아 가면서 그의 생애와 작품·사상·예술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평전은 평전이되 공간의 현장성을 질 높은 도판과 산뜻한 디자인으로 담아 낸 입체적 평전의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인문 교양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 왔다. 서른 번째로 만나는 거장은 서양미술사를 수놓은 성좌 중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빈센트 반 고흐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거장 화가로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드바르 뭉크, 클로드 모네, 얀 페르메이르, 에드가르 드가에 이어 여섯 번째다.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고 평생 세상과 불화하며 부랑자처럼 떠돌았지만 죽은 뒤 서양미술사상 가장 높고 찬란한 명성을 누린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는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고 한 자크 라캉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극한의 광기로 치닫다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 예술가로만 여기지만, 그는 누구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자기 안의 깊은 고독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날마다 치열하게 분투한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37년이라는 짧은 생의 여정 동안 어디에도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유배자처럼 떠돌았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너무나 투명한 영혼을 가진 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기성의 보수적 체제에 늘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며 저항했는데, 그것은 창조적 모험이라 할 만한 탈주로 이어졌다. 그가 이 지상에서 보여 준 탈주의 파노라마는 결국 영원과 닿아 있는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다.
저자인 미술평론가 유경희는, 내면의 깊은 상실과 결핍을 오히려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아 눈부신 예술 세계를 일군 반 고흐의 행보를 따라간다. 저자의 여정은 특히 화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킨 프랑스의 아를, 생레미드프로방스, 오베르쉬르우아즈 등에 집중되어 있다. 저자는, 평생 고단하게 떠돌았던 반 고흐라는 한 인간에 접속하여 그를 이해해 보고자 한 이 시도는 “빈센트 반 고흐-되기의 시간”이자, “빈센트로 시작해 나에게 도달한 영적인 여행”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빈센트처럼 사물과 사람을 보는 습성도 생겼다. 그는 사람들이 충분히 감탄하지 않는다며 불평했는데, 나는 무엇보다 그처럼 감탄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반 고흐의 “방황과 방랑은 자기만의 삶을 구축하기 위한 너무도 건강한 삶의 드라이브이자 메커니즘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_ 예술이라는 구도의 길
반 고흐의 인생은 주로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보낸 전기와, 프랑스의 파리, 아를, 생레미드프로방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보낸 후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는 큰아버지 센트가 운영하던 구필화랑 덴하흐 지점의 화상으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때 유명 화가들과 작품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장 프랑수아 밀레를 필두로 한 바르비종파의 자연 친화적 화풍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림 파는 일을 그만둔 뒤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종교적 포부를 안고 평신도 전도사로서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보리나주 광산촌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교단으로부터 전도사로서 부적합하다는 판결을 받은 그는 종교 대신 예술이라는 구도의 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가로서 반 고흐의 인생은 세계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파리에서는 무엇보다도 인상주의 사조를 접하면서 그의 그림도 초기의 어둡고 무거운 색조에서 강렬하고 생기 있는 색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즉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색채 속에서 삶을 찾고자 했으며, 진정한 그림이란 색채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파리보다는 보다 밝은 빛과 따뜻한 색채가 있는 곳에서 예술가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밀레와 앙리 루소가 주축이 되어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인 바르비종에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반 고흐의 아를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장 폭발적으로 분출한 생의 마지막 3년의 시작점이다.
밝고 화사한 색으로 뒤덮인 남프랑스 아를의 봄은 마치 그가 꿈꾼 유토피아에서 온 편지 같았다. 그리고 반 고흐가 테오의 돈으로 심혈을 기울여 꾸민 ‘노란 집’은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꿈의 아지트 같았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 건설의 동지라고 여긴 폴 고갱과의 갈등이 끝내 비극적 결말로 치달으면서 반 고흐의 꿈도 모두 부서지고 말았다. 이후 정신 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그는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약 1년간 머물렀다. 당시 반복되는 발작과 불안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그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 〈꽃핀 아몬드나무〉를 비롯하여 〈올리브나무〉, 〈사이프러스나무〉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이후 요양원을 떠나 파리와 가까운 오베르쉬르우아즈라는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옮긴 반 고흐는 마을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드넓게 펼쳐진 밀밭, 포도밭, 나무, 정원 등을 그렸다. 특히 죽기 얼마 전에 그린 〈구름 낀 하늘 아래의 밑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생의 끄트머리에 선 그가 느꼈을 절망감과 고독감이 사무치게 묻어난다. 1890년 7월, 그는 저물녘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이틀 뒤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살아생전에 그는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람들도 내 인생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라고 했는데, 그의 예견대로 이제는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다.
◎ 본문 속에서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아포리즘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내 삶을 관통하는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단박에 빈센트를 떠올렸다. 그는 창조적 모험이라고 할 만한 방황에 함께할 동반자를 평생 찾아 헤맸다. 사실 그는 일생 동안 기성세대의 보수적 이념과 구태의연한 체제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으로 경계하며 저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빈센트와 만나 수년간 동거했다. 그 동거는 정주가 아닌 탈주의 동거였다.(18쪽)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늘 딴 생각을 했고, 생각은 시시각각 변했다. 하루에도 감정이 수십 번씩 변했고, 늘 다른 직업이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림으로 성과가 나지 않을 때는 농장 일, 군대 입대, 위생병, 다시 화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꿈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를 안정되고 살 만한 삶으로 이끌었던 것은 그림 그리기였다. 그림은 불안을 차단하는 장막이 되어 주었다.(26쪽)
그렇다면 빈센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냉혹할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 때 그는 “나는 정열의 인간이고, 다소 무분별하고 지나친 행동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종종 후회하기도 해. 더욱 참고 기다리는 편이 좋았을 때도 바로 말을 뱉거나 행동하는 경우도 자주 있어.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예민하고 우울하고 변덕스럽다고 느꼈다. 자기가 보낸 호의나 작품에 대해 어떤 응답이나 보수가 곧바로 오지 않을 때는 낙담과 분노 혹은 모욕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순진할 정도로 사람을 잘 믿는 그가 역설적으로 사람에 대해 곧잘 의심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는 점도 아주 특이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광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각, 자신을 타자화해서 보는 능력도 갖추었다.(29~30쪽)
빈센트가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규칙적으로 온전히 그림을 그려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부단하게 노력했다는 증거다. 그림 그리는 일은, 그것도 추상도 아니고 구상은 매우 아폴론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물감을 섞어 제대로 된 색을 만들고, 형태를 만들고 구성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성적인 집중과 온전한 정신을 요구하는 일이니까 말이다.(44~45쪽)
폴 세잔은 빈센트가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미치광이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그렇게 자극받은 빈센트의 그림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즉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색채 속에서 삶을 찾고자 했으며, 진정한 그림이란 색채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74쪽)
파리는 자유로웠지만 사람들은 냉담했고 빈센트는 고독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치열한 생존경쟁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나름의 예술을 추구할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떠올린 곳은 남프랑스였다. 이를테면 로트레크가 유년을 보낸 프로방스, 몽티셀리가 떠난 프로방스,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 같은 곳 말이다. 그리고 빈센트는 남프랑스가 따뜻한 태양과 다채로운 색채, 값싼 생활비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다른 화가들을 초청하여 공동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81쪽)
빈센트는 인생의 종착점에서 사진을 보고 어머니의 초상을 그렸고, 시 한 편을 함께 썼다. 훗날 그는 모든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이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가슴을 녹인다고 고백했다. 모성애를 환기하는 모든 이미지는 빈센트를 사로잡았다. 꽃꽂이, 바느질, 요람 흔들기, 불가에 앉아 있기 등.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어린아이가 원할 법한 모성애와 그 상징에 집착했다. 어머니는 그를 버렸지만, 그의 내면은 지극한 모성을 찾는 일을 단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109쪽)
빈센트가 독서의 세계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질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통당하고 소외감을 느낄 때마다 그는 무작정 걷거나 독서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열한 살 때 강제로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도, 런던에서 하숙집 여인 유지니에게서 실연당한 뒤에도 그는 많은 시간을 고독한 취미 생활인 산책과 독서와 편지 쓰기로 보냈다.(121쪽)
빈센트가 이토록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감동할 줄 아는 존재였음을 말해 준다. 자연에 대해 그러했듯이 예술에 대해서도 연신 감탄한 빈센트는 자주 흔들렸고, 자극받았고, 위로받았다. 그는 예술가야말로 어떤 순간에도 진정으로 감동할 줄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모든 만물을 처음 보듯 감탄했던 것처럼. 그래서 “되도록 많이 감탄하려무나.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감탄하지를 않아”라고 테오에게 보낸 조언은 비단 테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129~130쪽)
아를에 가게 된다면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이 반 고흐가 머물렀던 노란 집이었다. 아를을 생각하면 언제나 나는 반 고흐가 드나들던 카페보다 노란 집을 가 보고 싶었다. 작가의 작업실이 훨씬 호기심을 자극했던 탓이다. 게다가 노란 집에서 탄생한 빈센트의 걸작은 또 얼마나 뭉클한 것인가. 제일 보고 싶은 것은 제일 나중에 보려고 남겨 둔 채 해거름이 질 때까지 강둑을 걷고 또 걷다가 도착했다. 이미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노란 집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포기할 수 없었다.(153쪽)
빈센트가 사로잡힌 것은 초상화였다. 그는 “인간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다.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 가장 진지한 것의 표출이다”라고 말했다. 평생을 모델을 찾는 데 열중했던 그에게 초상화란 유일하게 사람을 소유하는 경험을 해 주는 장르였다. 그는 모델을 선정해 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그 자신이 주도적인 위치가 된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그는 개성 있는 모델을 구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164쪽)
그런 빈센트는 들판의 농민이나 우체부와 카페의 주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다. 그는 인물들을 면밀하게 관찰해 개성을 포착했고, 그 자신의 명확한 확신에 의해 재현했다. 그렇게 탄생한 초상화는 아무런 허식이 없이 간결하고도 자연스러웠다. 보통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빈센트는 보통 사람을 보통 사람으로 그리기 위해 과거의 초상화에서 신비롭거나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드리웠던 짙은 음영은 물론이고 부드러운 채색과 피부의 분장을 말끔히 제거하고 거친 질감으로 피부를 자유롭게 표현했다.(165쪽)
생레미가 빈센트의 마을이라고 느껴진 것은 바로 그가 요양한 생폴드모졸수도원까지의 오래된 길 때문이다. 빈센트는 당시 생래미역에서 이 수도원까지 마차를 타고 갔지만, 나는 시내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수도원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 길은 빈센트 반 고흐의 여정에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 주었다.(204쪽)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빈센트의 예술을 낳은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애정 결핍으로 인한 인정 욕망이었다는 것을 밝혔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한 존재에게는 수만 년 동안 살아남은 유전자가 새겨져 있다. 그에게는 집단 무의식, 개인 무의식을 비롯해 시대정신, 에피스테메, 가족, 자연, 환경, 친구, 교육, 심지어 전생까지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빈센트라는 한 존재를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되, 한편으로는 감정이입과 공감이라는 시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으로 객관화하고 타자화하는 시선으로 임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내게 미스터리한 존재다. 아니 한 존재를 미스터리로 놓아두는 것이 그를 새롭게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줄 것이다.(278~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