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맞이한 첫 봄방학
봄의 도시에서, 생의 봄으로 되돌아가다
『돈이 아닌 것들을 버는 가게』를 쓴 남형석 작가는 신문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방송기자를 거쳐 뉴스기획PD를 하며 삼십대를 보냈습니다. 마흔이 되어서는 긴 휴직계를 내고 춘천으로 떠나와 돈이 아닌 가치들이 교환되고 쌓이는 시한부 공유서재를 차렸지요. 단 스무 달만 문을 여는 특별한 꿈의 서재, 첫서재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겨울의 터널을 지나 봄에 이르는 그 짧은 방학,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맞이한 봄방학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날수록 일용할 양식이 일어나는 직업, 기자. 그래서 매일 밤 더 많은 사고가 나길 소원하며 잠들었던 사람. 정신없이 취재하고 방송하다 새벽 무렵 집으로 돌아오다 문득 깨닫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요. 작가는 마흔을 앞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돈을 벌고자 하루 삼분의 일을 꼬박꼬박 바치며 살았던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멈추고, 직장의 생태계와는 180도 다른 계절에서 몇 달만이라도 살아보면 어떨까 하고요. 지난 삼십대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길러지는 사이에 더 인간다울 수 있는 가치들을 생의 행로에 버려두고 온 것만 같았거든요. 새로 떠나는 곳에서는 길에 버려진 그 작은 것들을 천천히 되걸으며 주워담아보려 합니다.
그렇게 일 년간 준비기간을 둔 뒤 이듬해 2월, 휴직계를 내고 나만의 봄방학을 갖자 다짐합니다. 서울을 벗어난 어딘가에서 스스로 설계한 삶대로 마음껏 살다오기로요. 휴직 기간은 스무 달 남짓. 일곱 번의 계절을 보낼 곳인 만큼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동네, 오래 눌러앉아 함께 들숨과 날숨을 내쉬고픈 기운을 주는 동네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 닿을 듯 말 듯한 감정에 가장 가까운 도시를 운명처럼 만났죠. ‘봄’을 이름에 품은 유일한 도시, 춘천이었습니다.
소도시의 옛 골목 서재에서 일어나는
소소하고 신비로운 일상
춘천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오래되고 느릿한 서정의 풍경을 간직한 동네, 약사리 마을. 슬레이트 지붕과 구식 기와의 단층집들 사이로 칠십여 년간 터를 지킨 성당의 첨탑이 고아하게 드러나고 시멘트가 다 벗겨진 샛길이 단풍나무 잔가지처럼 하늘로 길쭉하게 뻗어 있는 곳.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직감으로 전해지는 이 아늑한 언덕 끄트머리 샛길에는 입간판이 없으면 가정집으로 착각할 듯한 작은 가게가 있습니다.
책이 진열되어 있다지만 서점은 아니고 커피를 내려준다지만 카페도 아닙니다. ‘공유서재’라는 이름이 붙은 이 가게는 책과 음료가 아닌 공간을 팝니다. 오래 방치되어 있던 옛집을 서재로 탈바꿈시킨 이곳엔 예전에 이곳에 살다간 이들의 흔적이 오래된 지붕과 녹슨 타일 외벽, 재래식 변소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롭게 이 집을 맞이한 서재지기의 정갈한 손길이 묻어 있다는 것이죠.
이곳에서 서재지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꿈을 꿉니다. 스스로 읽고 쓰려고 만든 공간에 영감과 꿈을 품은 사람들을 초대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쌓이지 않을지 기대하면서요. 그런 신비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역량껏 글로 엮어보고자 했지요. 나의 서재이지만 모두의 서재인 곳, 그런 꿈의 서재에서 돈이 아닌 다른 것들을 벌어보고 싶었다고요.
돈이 아닌 것들을 버는 가게. 이렇게 ‘첫서재’에는 돈 대신 사람들과 사연이 투박하게 쌓여갑니다. 세상 모든 처음이 시작되거나 기억되는 곳, 저마다의 서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모여드는 공간이지요. 서투름과 불안을 안고 시작하려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거나 위로가 되거나 적어도 쉼이 되는 공간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지었습니다. 여기에 다녀가는 모든 이의 ‘첫’들이 시나브로 쌓이는 공간으로 숙성해주길 바라면서요.
꿈과 취향과 사연이
느슨하게 엉킨 책의 소우주, 첫서재
앞마당 라일락나무 아래에는 누워서 햇살 먹으며 책 읽기 좋은 벤치를 짜두었고 재래식 변소에는 변기 대신 옛날 방 문짝으로 만든 책상과 나무 의자, 무전력 원목 스피커, 손바닥만한 나무 오르골을 놓았습니다. 문을 열고 본채로 들어가면 원목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책들로 가득합니다. 누구나 편히 들러 생각을 푹 익히거나 활자의 숲에서 산책하는 기분을 느끼는 공간, 저마다 자기 일을 하지만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연대감이 공기를 타고 흐르는 곳. 누군가는 돈을 내고 이용하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누군가는 꿈을 내고 이용하는 서재. 겉보기에는 북카페 혹은 공유서재이지만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꿈과 취향과 사연이 느슨하게 엉킨 책의 소우주인 셈입니다.
서재에는 입구가 숨겨진 비밀스러운 다락방도 있습니다. 부서져가는 지붕 아래 나무 천장을 덧대고 대들보를 다듬고 돌담이 보이도록 키 작은 창문을 냈지요. 느릅나무를 깎아 만든 아담한 고목 탁자를 방안에 두고 원목 스탠드와 스피커를 올려두었습니다. 서재의 다락방인 만큼 몇 권의 책을 누일 나무 바구니도 함께요. 침대와 침구도 정성스럽게 골랐답니다. 이름은 ‘첫다락’으로 지었어요. 이 두 평 남짓한 다락방에는 일주일에 한 사람씩 꼬박꼬박 머물다 떠납니다. 일종의 ‘북스테이’이지만 숙박 기준이 특별합니다. 며칠을 머물든 비용을 당장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무는 대가는 오 년 뒤에 돈이 아닌 것들로 내면 됩니다. 쉼이나 영감을 얻는 시간이 절실한 이들을 위한, 땅에서 조금 떨어진 두 평 남짓한 은신처인 셈이지요. 새로운 시작을 궁리하거나 감행하는 첫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나만의 것으로 시작했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 가게
2022년 11월이면 지금 형태의 첫서재는 문을 닫습니다. 애초에 스무 달만 운영하고 닫을 요량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요. 올해 11월 6일에 마지막 문을 열고 작가는 회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게 문을 열고 보니 셈법을 한참 벗어난 감정들이 속속 들이닥쳤다고 해요. 돈을 내야 하는 가게에 찾아와 불쑥 선물을 내밀고 떠나는가 하면 뭐라도 드시라며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동네 손님들이 있었죠. 하나같이 정성스럽게 남기고 간 손글씨들은 어떡하고요. 그저 ‘스무 달 동안 나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며 살다가 문 닫지 뭐’라고 생각하며 문을 연 가게는 어느새 겨우내 얼지 않을 작고 단단한 다정함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서재에는 한 겹, 두 겹, 체온과 손길이 소복하게 쌓여가지요.
작가는 묻습니다. 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나는 어디에 가닿아 있을까 하고요. 학창시절의 짧은 봄방학은 늘 길고 익숙했던 한 세계와의 작별이었고 그 끝은 미지의 진입로와 맞닿아 있었는데 지금의 나 역시 그때와 같을까요. 익숙했던 세계를 벗어나 처음 보는 삶과 운명처럼 조우하게 될까요. 아니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원래 자리로 무덤덤하게 귀환하게 될까요.
어른의 봄방학이 간절한 여러분을 춘천시 춘천로 145번길 36, ‘첫서재’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