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추리작가협회 실버대거상 수상작
인형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정말로 사람을 죽인 독살범일까?제한 시간이 주는 서스펜스 속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본격 추리!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유명 사진사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남편의 조수를 독살한다. 순조로운 경찰 조사와 그녀의 자백으로 사건은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는데……. 사형선고가 내려진 직후, 런던 경찰청에 전달된 한 장의 사진이 모든 살해 정황을 부정하고 만다. 과연 그녀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독살범일까, 혹은 다른 이의 범행을 감춰주고 있는 무고한 여성일까?
『밀랍 인형』은 현대 영국 미스터리의 거장 피터 러브시의 첫 번째 탐정 ‘크리브 경사’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다.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집행 일자까지 잡힌 상황에서, 사형수의 자백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증거가 나타나자 런던 경찰청은 자칫 시민들이 경찰력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고 만다. 이에 수사관으로써 유능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리브를 점찍은 조잇 경감은 얼핏 명약관화해 보였던 이 사건을 비밀리에 재검토해줄 것을 명령한다.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열흘 남짓. 크리브는 누구의 도움도 구하지 못하는 채 홀로 사건을 재수사해야만 한다.
이처럼 『밀랍 인형』은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2), 조너선 래티머의 『처형 6일 전』(이수현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5)처럼 제한된 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주는 서스펜스에 더해, 러브시의 장기인 생생한 시대 묘사와 유머 감각이 발휘되어 독자가 순식간에 사건에 몰입케 한다. ‘크리브 경사’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작품은 러브시에게 영국추리작가협회로부터 처음으로 실버대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치밀한 역사적 고증으로 쌓아 올린 ‘고전 미스터리’
실화를 결합해서 만든 고전적인 미스터리인 『밀랍 인형』에서 ‘고전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현대에 과거를 재구성했다는 의미와, 정통 경찰소설의 플롯과 반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공존한다. 사형 집행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차분한 미모의 여성 살인 용의자, 그를 둘러싼 치정 관계, 와인 디캔터가 든 찬장에 접근하는 범행 방법의 트릭, 그리고 알리바이 입증까지 어우러진 범죄수사소설이다.
- 박현주,『밀랍 인형』의 ‘해설’ 중에서
‘플롯의 제왕’ 피터 러브시의 특기 중 하나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실존 인물이나 작품, 사건 등을, 정확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이야기와 긴밀하게 직조하는 것이다. 그는 『가짜 경감 듀』(이동윤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2)에서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을 뿐 아니라, 지명, 사건, 상점 이름 등 자잘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채워 넣은 바 있다. 마찬가지로 『밀랍 인형』에서도, 러브시는 생생한 역사적 사실의 힘을 빌려 ‘고전 미스터리’를 더욱 그럴듯하게 재구성한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밀랍 인형』에는 그 당시 실제로 유명했던 여성 독살범들이 다수 언급된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형수 미리엄 크로머 또한 그들에게서 한 조각씩 떼어 와 완성시킨 듯한 인물로 보인다. 크리브가 진상을 밝히기 위해 뛰어다니는 런던 거리 곳곳은 모두 실재하는 장소이며, 런던 경찰청 초창기에 고위직을 맡았던 인물과 당대의 유명 정치인 등 영국 고전 미스터리의 독자라면 반가울 법한 이름들이 속속 등장하기도 한다. 사형수 미리엄 크로머, 크리브 경사와 함께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형집행관 제임스 베리 또한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삼고 있어 작품의 핍진성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
러브시의‘고전’에 대한 관심은 시대적인 의미에서 ‘고전’만은 아니다. 『밀랍 인형』은 시대 배경뿐 아니라 플롯과 설정, 사건의 개요, 점차 밝혀지는 인물들 간의 관계, 그 속에 숨겨진 치정 다툼까지 ‘고전’의 요소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다. 게다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가능케 하는 트릭과 알리바이의 입증 방식 등은 ‘황금기 미스터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단, 러브시는 고전적인 소재를 고스란히 가져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해 풀어낸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고전 미스터리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옛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스테디셀러가 되어 러브시를 현대 영국 미스터리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러브시의 첫 번째 탐정 ‘크리브 경사’의 마지막 사건
1970년 당시 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피터 러브시는 첫 미스터리 장편 『죽음을 향해 비틀비틀(Wobble to Death)』로 공모전에서 우승하며 미스터리 작가로 데뷔했다. ‘크리브 경사’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시리즈로 집필할 예정이 없었으나 그가 활약하는 작품이 늘어가면서 차차 개성을 갖췄다.
고지식하다 싶을 만큼 고집스럽고 늘 진중한 크리브는 데뷔작을 포함하여 총 8편의 장편 작품에서 활약하는데, 파트너인 ‘새커리 경위’가 없이 홀로 등장하는 것은 『밀랍 인형』이 유일하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이 작품에서 크리브는 경관으로서 유능한 실력을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동기들에 비해 낮은 계급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고,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상관에게 분노하기도 하는 등 한층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현대 독자에게서도 공감을 끌어낸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의 귀환
2018년 30번째 작품을 출간한 뒤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 4년 만에 새로운 판형과 디자인으로 돌아왔다. ‘미스터리 책장’의 새로운 시작을 여는 첫 주자는 총 다섯 작품으로 얼 스탠리 가드너의 『벨벳 속의 발톱』, 피터 러브시의 『밀랍 인형』, 존 딕슨 카의 『마녀의 은신처』, 조젯 헤이어의 『조심해, 독이야!』, 로널드 녹스의 『철교 살인 사건』이다. 미스터리 초심자부터 장르 문법에 익숙한 마니아까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작품부터 골라 펼쳐볼 수 있도록 다채롭게 구성했으며, 앞으로도 ‘미스터리 책장’은 꾸준히 미스터리 걸작을 국내 독자에게 소개해나갈 예정이다.
2012년 첫 출간된 ‘미스터리 책장’은 전 세계 미스터리 거장의 주옥같은 명작을 담은 미스터리 소설 전집이다. 이전까지 일서 중역과 축약본으로밖에 읽을 수 없었던 전설의 미스터리, 미처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믿을 수 있는 전문 번역가의 번역과 멋진 장정으로 새롭게 선보였다. 본격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서스펜스, 스릴러, 유머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와 다채로운 걸작을 국내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도록 힘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