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악에 대항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인권의 뿌리를 추적한 문화사 및 지성사의 명저
인권은 어떻게 발명되었으며,
그 격동의 역사는 인권에 대한 지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놀랍다. 단 몇 페이지에도 엄청난 근거를 제시하며 대단한 명료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그야말로 역작이다. _고든 S. 우드, 〈뉴욕타임스 북리뷰〉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역사가의 작품으로, 강력한 인권 사상의 출현과 발전을 다룬 놀라운 역사다. _아마르티아 센(하버드대 교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인권은 악에 대항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우리는 인권에 대한 18세기적 전망을 아직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특히 「세계 인권 선언」에서 말하는 ‘인(Human)’이,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에서 ‘인간(man)’이 갖는 모호함 같은 것을 남겨두지 않도록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권리의 폭포수는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야 하는지를 두고 항상 큰 갈등을 겪게 마련이지만 쉼없이 계속 흘러간다.” (238-239쪽)
서구의 발명품 인권
18세기 프랑스 문화사의 권위자인 린 헌트가 썼고, 우리 사회의 성실하고 뛰어난 문화사학자 전진성이 번역한 『인권의 발명』이 ‘교유서가 어제의 책’ 시리즈로 다시 출간됐다. 린 헌트는 신문화사의 흐름을 만든 대표적인 역사학자로, 역사 연구의 주류였던 특정한 시기에 정치적으로 야기된 큰 사건이나 체제 변화를 연구하기보다는 민중의 일상에서 정치적 문화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데 주목했다. 인류 절반의 구성원이면서도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여성을 역사의 주체로 드러낸 것도 저자가 연구한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이러한 저자의 정치문화사적 연구를 바탕으로 향한 시선이 ‘인권’이다. 저자가 그동안 축적해온 지적인 연구 작업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이는 서론에서 밝힌 마지막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역사적 변화에 대한 고찰은 궁극적으로는 개인 정신의 변화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인권이 자명해지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새로운 감정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이해력을 갖추어야 했다.”(41-42쪽) 따라서 이 책은 인권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일상으로 녹아들며 실천되었는지 역사적 근거를 들어 파고든다. 그렇다고 인권에 대한 통사는 아니며 ‘인권’에 대한 실천적 전망을 보여주는 책도 아니다. 린 헌트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 소개한 조한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이 책을 추천하며 “저자는 (인권에 대한) ‘발명’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아직도 더 완성되어야 할 이유를 오늘날의 제반 문제점들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도 진행중인 ‘발명’이다. 여기에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인권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개념이 역설적으로 바로 그 모호함 덕분에 지구적 보편성을 획득해갈 수 있었다는 통찰이야말로 이 책을 다시 펼쳐 들게 만드는 이유이다. 인권이라는 “혁명적 논리가 뿜어내는 불도저 같은 힘”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미지의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고취시켰다. _「옮긴이 서문」에서
인권의 세 요소인 자연성, 평등성, 보편성 그리고 정치
저자는 인권은 서로 맞물린 세 가지 특성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타고나야 한다는 자연성,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평등성, 모든 곳에 적용이 가능한 보편성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적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 인간의 권리는 신이나 동물의 권리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서로에 대한 권리, 자연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권리를 의미한다. 이에 인권의 필수 조건인 자연성과 평등성, 보편성 세 가지가 17세기에 영국에서 작성된 「권리장전」에는 없었지만, 18세기 미국의 「독립 선언문」,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는 표현돼 있다.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온전한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18세기에 인권이 보편적인 사실이라고 확신에 차 선언했던 당사자들이 어린이, 광인, 수형자, 외국인에 대해서는 무능하고 가치 없다고 여겨 정치적으로 배제했다고 지적한다. 18세기에 매몰돼 상대적 ‘진보성’을 자화자찬하는 것도 경계한다. 무산자, 노예, 흑인, 종교적 소수자, 여성에 대해서 현대 사회에서도 진정한 권리를 가졌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어찌 (노예 소유주인 재퍼슨, 귀족 라파예트 같은) 유산자, 엘리트, 인종주의자, 여성혐오주의자라는 평을 듣는 이들이 인권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
“자율과 공감은 문화적 실천이지, 그저 이념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꽤 직접적으로 체현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물리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차원을 갖는다. (…) 자율과 공감은 18세기의 옅은 대기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니며,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수백 년간 개인은 공동체의 여러 관계에서 자신을 떼어내기 시작했고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점점 더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갔다. (…) 이 같은 행위의 변화 발전에서 도약은 18세기 후반에 일어났다.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가 문제시되었다. 청중들이 연극 공연을 보거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초상화와 풍속화가 신화나 역사를 다루는 주류 아카데미 회화의 지배권에 도전했다. 소설과 신문이 번성하며 광범위한 독자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36-37쪽)
소설 읽기와 상상된 공감
18세기 이전에 없던 인권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18세기에 형성되었을까. 저자의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개개인에게 자율과 공감을 파급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공 전시장의 그림 감상부터 사랑과 결혼에 관한 보급판 서한소설 읽기 등의 새로운 사회문화적 경험들이 본격적으로 인권을 올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아의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데 18세기에 그런 경험―타인이 자신과 같다는 상상―이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판단했다. 이는 당대에 나온 고문에 대한 비평, 서한소설 읽기의 결과로 사회정치적 삶의 조직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로 재귀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새로운 독서(관람)는 새로운 개인적 경험(공감)을 창출했고, 이것은 다시 새로운 사회정치적 관념(인권)을 낳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맹이 많았던 제한이 있더라도 18세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소설 간행과 독자 인구가 타인에 대한 공감을 낳고 평등을 상상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소설의 지지자들은 리처드슨이나 루소 같은 저자들이 독자를 일종의 종교 체험에 준하는 일상생활로 이끈다는 점을 이해했다. 독자는 일상의 감성적 밀도를 이해하고, 자신 같은 대중이 스스로 도덕적 세계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권은 이 같은 감정들이 뿌려진 온상에서 자라났다. 인권은 오직 대중들이 타인들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허구적이긴 해도, 드라마에서만은 현재적이며 친숙하고 평범한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조금이나마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평등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