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에게 영감을 준 작가
격동의 삶을 살아간 혁명가이자 문필가
보리스 사빈코프의 대표작
『창백한 말』
장동건, 이준호, 김상중 주연의 영화 〈아나키스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 제2의 사빈코프가 되고 싶다고 했지?’
사빈코프는 당시 많은 혁명가들의 목표이자 이상이었다. 수많은 권력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절정의 암살 능력과 카뮈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을 준 그의 탁월한 글들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사빈코프가 진정 혁명가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위계적 권력에 대한 그치지 않는 투쟁, 민중의 자유를 믿고 그것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삶. 민중의 이름으로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가 점차 권력 그 자체만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사빈코프는 약자의 편에, 민중의 편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보단 계란이 되길 택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숱한 고난과 고초로 가득했다.
테러리스트라는 무시무시한 직업에도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는 일제강점기사를 공부한 우리들이 연민과 존경의 감정을 안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가들과 많이 닮아 있다. 독립 운동을 통해 ‘영원한 쾌락의’ 삶을 살고자 한 이봉창 의사의 사진처럼, 사빈코프의 인생과 삶을 보면 범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단한 신념과 굵은 신경줄을 갖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린 『창백한 말』을 통해 고뇌하는 인간 사빈코프를 마주할 수 있다. 그는 민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은 내려놓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목소리만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무자비하게 권력자들에게 총탄을 박으면서도 자신의 살인이 그리스도 앞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증오로 똘똘 뭉친 수류탄을 던지지만, 그는 이 수류탄이 세상에 진정 사랑을 퍼뜨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뇌한다.
그런 의미로 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속을 휩쓸었을 번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사빈코프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려는 새처럼’ 각자만의 투쟁을 하고 있다. 모두의 인생엔 저마다의 좌절과 고뇌, 이상과 목표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고 분노하며 때론 그것이 어떤 일의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 우리를 꼭 안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사랑하며 각자만의 고유한 답을 찾게 된다. ‘『창백한 말』은 과거에서 온 미래의 소설이다’라고 말한 정지돈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우리네 삶의 힘든 여정에서도 끊임없이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