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
절필을 선언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
모두가 입을 모아 “이제 노벨문학상만 받으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필립 로스는 작가에게 허락된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한 작가다. 1959년 『굿바이, 콜럼버스』로 데뷔해 50여 년간 서른한 권의 작품을 발표했고,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펜/포크너 상, 펜/나보코프 상, 펜/솔 벨로 상, 미국 예술문학아카데미 골드 메달,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등을 수상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꾸준히 주목을 받아온데다 열렬한 논쟁의 한복판에 서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으니, 어쩌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작가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지난 2012년 돌연 절필을 선언했다. “저는 다 끝냈습니다. 『네메시스』가 제 마지막 책이 될 겁니다.” 필립 로스답게 간결하고 단호한 선언이었고, 이 말은 이후 번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네메시스』(2010)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불운, 쓸데없는 죄책감, 그리고 잘못된 선택
운명과 화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1944년 여름의 뉴어크. 주인공은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 버키 캔터다. 키는 작지만 몸이 다부지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버키는, 자신도 전장으로 가겠다는 오랜 꿈이 시력 탓에 좌절되자 크게 낙담한다. 또래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버키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버키 자신은 그 사실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지만, 놀이터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늠름하고 확신에 찬 버키 선생님은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던 중 폴리오 유행병이 뉴어크 전역을 장악한다. 아직 폴리오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던 시절, 아이들이 하나둘 폴리오에 감염돼 병원에 실려가고, 몸이 마비되거나 목숨을 잃는다. 도시 전체가 불안과 공포에 전염된다. 남은 아이들을 의연하게 돌보던 버키도 혼란과 두려움을 느낀다.
방학 동안 포코노 산맥의 인디언 힐 유대인 소년 소녀 캠프에 교사로 가 있던 버키의 여자친구 마샤는 뉴어크에 있는 버키가 폴리오에 걸릴까 걱정하며, 놀이터 감독을 그만두고 인디언 힐에 오라고 버키를 설득한다.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던 버키는 마샤 아버지와의 대화 도중 충동적으로 인디언 힐 행을 결심하고 마샤에게 청혼까지 한다.
그러나 포코노 산맥에 도착한 그는 이내 격렬한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단어 ‘네메시스Nemesis’의 사전적 의미는 ‘천벌’ 또는 ‘복수의 여신’이다. 필립 로스는 한 인터뷰에서 ‘네메시스’의 의미를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이라고 직접 설명한 바 있다. 그가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미국 문학의 고전을 펴내는 비영리 출판사)에서 펴낸 완전 결정판에 ‘네메시스Nemeses’로 분류해 묶은 후기 작품, 『에브리맨』『울분』『전락』『네메시스』는 모두 예기치 않은 불운으로 죽음 혹은 몰락을 맞닥뜨린 인생에 대해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네메시스』 속의 네메시스는 폴리오 유행병인 것처럼 보인다. 폴리오는 무차별적으로 무자비하게 여러 아이들과 버키 캔터의 삶을 짓밟았다. 하지만 버키를 무너뜨린 진짜 네메시스는 그의 가혹한 의무감, 병적인 죄책감, 엄격한 선善에 대한 집착 그리고 두려움이다.
『네메시스』는 전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시선이 더 바깥까지 가닿는다는 인상을 준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닥친 비극보다 이웃에게 닥친 비극에 집중한다. 그 비극을 생생히 목도하고 자신의 책임에 대해 고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필립 로스 식으로 전개되고, 또 그 와중에 어떤 부분에서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과 블랙코미디를 선사한다. 그동안 필립 로스의 작품들에서 반복해 이야기되어온 테마들이나 이전과 비슷한 등장인물들을 떠올리며 읽는 재미도 크다.
무엇보다 『네메시스』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가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든 아니든, 한 명의 대가가 작가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며 심취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엿보는 것은 독자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