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저널리즘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책”
유가족인 아사노는 가해 기업 JR과 어떻게 마주했으며
이 거대한 조직의 어디에서 문제를 발견해 추궁했는가
이로써 무엇을 움직이고 바꾸려 했는가
나아가 사고를 둘러싼 언론 보도와 사회의 반응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가
사회적 참사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2005년 4월 25일 월요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가 일어났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네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대참사였다. 열차에 타고 있던 아사노 야사카즈의 아내와 여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둘째 딸은 중상을 입었다. 그날 길을 나섰던 것은 아사노가 자기 대신 작은어머니 문병을 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인데, 열차 둘째 칸에 타고 있던 가족 둘은 사체가 되어 돌아왔다. 아사노는 당시 ‘지역 환경 계획 연구소’라는 회사의 대표였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복구와 도시 재생을 위해 그는 시청과 주민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고, 10년에 걸친 프로젝트가 드디어 마무리됐다. 축하 파티가 열린 다음 날 아사노는 출근을 하고, 그의 가족 셋은 미뤄왔던 병문안을 위해 JR 서일본 쾌속 제5418M 열차를 탔다. 아내가 집을 나선 때는 오전 8시가 좀 지나서였고, 그로부터 1시간여 후 아사노는 사고 뉴스를 듣게 된다.
이 사건을 접한 당시 고베신문 기자 마쓰모토 하지무는 사건 당일부터 따라붙어 이를 철저히 파헤친다. 유가족 아사노는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10여 년간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아사노는 유가족으로서의 고통을 견디며 자기감정(“화산 분화구에 남겨진 기분이었어” “내 존재를 부정하고 싶다. 이 몸을 없애고 싶다”)은 일단 봉인해두었다. 또한 가해 기업에 대한 분노도 일단 미뤄둔 채 JR의 전현직 사장들을 직접 만나 진상 규명과 참사 재발 방지에 초점을 맞춰 기술자이자 협상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한다. 고베 대지진 때 활약했던 경험을 되살린 것이다.
사건은 일어난 원인이나 후의 대응과정을 볼 때 사회적 참사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우선, 사고 발생 직후 건널목 사고라는 ‘오보’가 났다. 정차역에 이르러서도 시속 40킬로미터 이상으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직진했으리라곤 철도회사나 경찰 모두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사고 후 유가족들은 한참 동안 ‘정보의 진공 상태’에 놓였다. 아사노가 영안실에서 죽은 아내를 접한 것은 사고 발생으로부터 40시간이 지나서였는데, 당사자나 관계자일수록 무슨 일이 어떤 규모로 벌어졌는지 알기 힘들다. 셋째, 당시 사장은 사고 한 달 뒤 추모식에서 유가족에게 등을 돌리고 조사弔詞를 읽었을 뿐,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직후 열린 유가족 설명회에도 불참석했을뿐더러 기자회견에서 사과 요구가 있자, “사과는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하는 것이다. 아직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은 단계에서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이 일은 유가족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넷째, 사고 원인을 조직의 문제에서 찾기보다는 운전사 개인의 실수(사고 때 사망했다)의 문제로 돌렸다. 다섯째, 탈선 사고조사위원이 오히려 가해 기업인 JR 서일본에 사전에 정보를 유출하는 스캔들이 일어났다. 여섯째, 유가족이 아닌 일반 시민들 일부는 2차 가해를 했다. “보상금 받을 거잖아. 불만 있어?” “심보를 그렇게 쓰니까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거야.”
가해자 JR 서일본, 피해자 아사노 야사카즈, 이 두 궤도가 나란히 길을 달리며 전개되는 이 책은 일본 현대사의 초상이기도 하다. 또한 10년에 걸친 그의 분투는 한국의 사회적 참사 유가족들과의 연대도 끌어내, 4.16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과 교류하면서 “유가족으로서 재난 참사를 사회화하는 게 우리의 책무다”라는 공통 인식을 형성해왔다.
한 유가족의 시선에서 바라보다
당하는 쪽에서 지는 사회적 책무란 무엇인가
“서일본 여객철도 주식회사(JR 서일본)의 다카라즈카발 도시샤마에행 쾌속 제5418M 열차(7량 편성)는 2005년 4월 25일(월) 9시 16분 10초경 이타미 역을 출발, 이나데라 역을 통과한 후 쓰카구치 역을 9시 18분 22초경 통과했다. 그 후 열차는 메이신 고속도로 남쪽에 있는 반경 304미터의 곡선을 주행 중, 제1량이 9시 18분 54초경 왼쪽으로 쓰러지면서 탈선, 이후 제2~5량도 탈선한 뒤 제7량이 9시 19분 04초에 정지했다.
제1량은 왼쪽으로 쓰러졌고, 앞부분은 선로 동쪽에 있는 아파트 1층의 기계식 주차장 안쪽 벽과 충돌, 뒤쪽 아랫부분은 아파트 서북쪽 기둥에 충돌했다. 또한 제2량은 중앙 좌측면이 제1량 뒷부분을 사이에 두고 아파트 서북쪽 기둥에, 뒤쪽 좌측면이 동북쪽 기둥에 충돌했다. 제3량은 앞쪽 바퀴 두 개가 왼쪽으로, 뒤쪽 바퀴 두 개가 오른쪽으로, 제4량은 네 바퀴가 오른쪽으로, 제5량은 앞쪽 바퀴 두 개가 왼쪽으로, 뒤쪽 바퀴 두 개가 선로에서 벗어나 탈선했다. 제6량과 제7량은 탈선하지 않았다.
이 사고로 107명이 사망하고, 562명이 부상했다. 이 사고는 운전사의 브레이크 사용이 늦었던 탓에 열차가 제한속도를 크게 벗어나면서 탈선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운전사의 브레이크 사용이 지연된 이유는 허위 보고를 요청한 차내 전화가 끊기고 난 뒤, 차장 및 관제사와의 무선에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웠던 점, 일근日勤교육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며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점으로 인해 운전에 대한 주의가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내용은 일본 국토교통부 항공철도 사고조사위원회가 사고로부터 2년 2개월 후에 공개한 보고서 첫머리에 기록된 개요다. 보고서는 243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원인을 기술하는데, 그마저 열두 줄에 불과했다. 이 사회적 참사를 낸 가해 기업은 사고 원인을 운전사의 부주의 탓으로 돌렸고, 사고에 대한 책임 회피를 보이면서 보고서 문장 역시 건조하게 썼다.
저자 마쓰모토는 이 최악의 참사를 아사노 야사카즈라는 한 유가족의 시선에서 바라보았다. ‘아사노는 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에 분노와 의문, 부조리를 느꼈으며,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는가. 가해 기업인 JR과 어떻게 마주했으며, 이 거대한 조직의 어디에서 문제를 발견해 추궁했는가. 이로써 무엇을 움직이고 바꾸려 했는가. 나아가 사고를 둘러싼 언론 보도와 사회의 반응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가.’ 즉 그는 사고의 전체적인 그림을 객관적으로 조감해서 그리기보다는 아사노 개인의 필터를 통해 여러 현상을 보았다. 그의 뒤에 서서, 그의 어깨너머로.
아사노의 언행은 기존의 재해 유가족들과는 크게 달랐다. 가족을 잃은 억울함과 슬픔, 가해 기업에 대한 분노, 원인 규명과 책임 추궁 면에서는 여느 유가족과 같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때로 난해했고, 가해 기업 JR에 대한 태도는 날카로우면서도 유연하고 때로 부드럽기까지 했다. 그는 감정에만 휩싸여 있지 않았다. 아사노는 도시계획 컨설턴트로서 고베 대지진 이후 도시 재생에 깊이 관여해왔던 인물이기에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유가족이 된 상황에서도 사고 원인의 과학적 규명과 재발 방지에 대한 시스템적 개선을 철저히 관철시켜나간다. 핵심은 그가 작성한 “사고 원인 4항목”으로, JR과 두고두고 대치하며 조직적·구조적 요인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4항목이란 징벌적인 일근교육, 여유가 없는 철도 시간표 편성, ATS-P(자동 열차 정지 장치의 새 버전) 미설치, 회사 전체의 안전 관리 체계 미비였다.
아사노는 이런 말을 했다. “사고를 교훈으로 삼아 JR은 자기네가 일으킨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원인을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게 우리 유가족들의 사명,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방적으로 가족을 빼앗기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유가족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다시 말해, 사고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며 “사고의 사회화”에 매달린다.
대부분의 사고는 구조와 조직의 문제다
매해 4월 25일엔 열차 사고 유가족과 희생자, 가해 기업, 시민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연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JR 서일본의 천황’이라 불리는 이데 마사타카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는 철도 민영화를 주도했는데, 이 사고의 원인 상당 부분은 국철의 민영화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운전사들이 실적과 속도에 대한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고를 일으킨 한 조직의 문화를 이끄는 이데에게 유가족들은 수차례 면담을 요청했지만 그는 재판 외의 공식석상에 나타나거나 언론 취재에 응한 적도 거의 없다.
이데를 비롯한 ‘국철 일가’의 강렬한 엘리트 의식과 그로 인해 스스로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부하 직원들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무오류주의’. 그 견고한 조직의 논리에 아사노는 사고 이후 10여 년간 모든 것을 걸고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뚫었다.
그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사노는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논리적이다. 그는 아내와 여동생에 대한 애통한 심정은 일단 미뤄둔 채 가해 기업 사장인 야마자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고 원인에 대한 공동 검증을 제안했다. “이건 과학기술 논쟁이다. 감정론이 아니다. 감정론만 얘기하다보면 안전으로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즉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뛰어넘어, 어떤 이유로 이런 사고가 났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나누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니 견해차가 커서 보고서는 양쪽 이야기를 다 기록하게 됐는데, 어쨌거나 이렇게 만들어진 공통된 인식은 추후의 회의들에서 논의 진행의 토대가 되었다.
사고의 조직적 구조를 분명히 밝히겠다는 아사노의 시도는 일본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실수의 원인이 현장에만 있지 않다고 보고 회사의 경영 이념, 경영진의 안전의식, 지휘 계통과 관리 방식, 직원 교육과 개개인의 책임감 등 얽혀든 여러 요인을 밝히고 개선하도록 촉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것을 파헤쳐야만 사고를 사회화할 수 있다. 사고의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유가족으로서의 내 책임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보고서에는 과학적 관점과 논리가 있고, 윤리가 있다. 이 시도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4년 4월 25일,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부터 꼬박 9년째 되는 날 열린 ‘4.25 네트워크’ 모임에서 한 아사노의 발언이다. 사고 이듬해부터 매년 아사노가 중심이 되어 기획하고, 안전 문제 연구자와 전문가를 초빙해 그 사고로부터 배울 점을 생각하며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런 그의 발언에는 과학기술의 사명, 유가족으로서의 책임, 문제를 사회화하는 관점, 확률론에 대한 반론, 안전과 경영의 양립 등 한 사람의 철학이 농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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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에 걸친 유가족 아사노의 분투도 대단하지만, 저자의 오랜 취재과정 역시 인상적이다. 책에 나오듯이, 저자는 언론에 얼굴을 비추는 법이 없는 ‘철도계의 천황’ 이데의 인터뷰를 이끌어내고, JR 서일본 전현직 사장들을 취재해 그 조직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낸다. 그들 중엔 철면피도 있고, 꽤나 인간적인 사장도 있었다. 게다가 저자는 처음에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던 아사노와의 거리도 끝내 좁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읽어낸다. 이로써 사고 후 15년이 지나 우직할 정도로 하나의 목표만 좇았던 아사노 야사카즈의 궤도는 서서히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