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노턴 네뷸러상 작가 부문 후보작!
소름끼치도록 강력한 여성 영웅의 등장!
◎ 도서 소개
미국 SF 판타지 작가 협회가 시상하는 안드레 노턴 네뷸러상 작가 부문 후보작. 공상 과학을 배경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을 새롭게 그려 낸 작품, 『아이언 위도우』는 2021 보스턴 글로브 베스트북과 북라이엇이 꼽은 ‘역대 최고의 공상 과학 소설 20권’에 선정되었다.
거대 병기 ‘크리살리스’는 어린 소녀들의 기를 양분 삼아 움직인다. 전투 한 번을 치를 때마다 죽어 나가는 소녀들 중에는 ‘측천’의 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니의 복수를 꿈꾸며 크리살리스 탑승에 자진한 측천은 뜻밖에도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거대한 힘을 확인한다.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여자는 하등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던 ‘화하’에 거대한 혁명의 바람이 분다.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여자들이 말한다. “무측천, 그들의 악몽이 되어라.”
◎ 줄거리
화하의 남성 조종사들은 거대 병기 ‘크리살리스’에 탑승하여 전쟁에 참여한다. 그 병기는 ‘첩 조종사’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기를 소모하여 움직인다. ‘다 쓴’ 배터리처럼 소진된 여성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려지고, 그녀의 가족들은 배상금을 지급받는다.
첩 조종사였던 측천의 언니 역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언니의 복수를 꿈꾸며 탑승한 첫 번째 크리살리스 전투에서, 측천은 압도적인 ‘기력’으로 남성 조종사를 파괴하고 홀로 살아남는다. 조종실의 문이 열리고 남성 조종사의 시체가 떨어진 순간,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여성의 등장에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남성보다 강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두어진 측천. 그러나 아무도 측천을 막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을 짓밟으려는 모든 시도를 부숴버리고 여성을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해왔던 가부장제를 산산조각 낼 것이다. 이제, 화하의 백성들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황제의 이름은 측천무후다.
◎ 책 속으로
P. 33
“겉모습이 어떻든 넌 내가 아는 측천이잖아.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난 네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라고 생각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순 없어. 이치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서는 떠날 수 없어.
“이치.”
내 목소리는 자욱한 연기가 낀 듯 어둑하게 들렸다.
“미안, 내가 좀…… 그랬나? 아, 그래. 너무 이상했지?”
이치의 웃음이 떨렸다.
“얼마나 이상했어? 수치로 표현해 봐. 1부터 시작해서, 제일 높은 수치는 ‘늙은 아저씨가 너한테 웃어보라고 말했을 때 드는 나쁜 기분’이라고 쳐. 얼마나 불편했어?”
“이치.”
나는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이 손의 미약한 온기가 지금부터 이치가 받게 될 충격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는 입을 다물고 당황한 얼굴로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입에서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그 말이 흘러나왔다.
“나, 첩 조종사로 입대할 거야.”
P. 58
“그럼 그냥 양광이 전투에서 죽어버리게 둬. 남자 조종사들이 스물다섯을 넘길 때까지 사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넌 몰라. 그를 죽이는 건 나여야만 해. 내가 직접 언니의 복수를 할 거야.”
“왜? 언젠가 그놈은 업보를 치르게 될 텐데.”
나는 말을 이로 으깨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세상엔 업보 같은 건 없어. 아니, 있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해당되지 않아. 우리 같은 사람은 그저 남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으려고 태어난 거야. 삶의 거대한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갈 여유도 우리에겐 없어.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뭔가를 원할 땐 주변의 모든 것들과 맞서 싸워서 억지로 빼앗아야 해.”
이치는 말이 없었다. 그저 피곤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반묶음 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깨끗하고 단정한 옷 앞으로 흩날리다가, 창문으로 들어온 거센 바람결에 옆으로 둥글게 말렸다.
“우린 어차피 다 죽을 거야. 그렇다면 적어도 언제나 꿈꿔왔던 일을 해봐야 하지 않겠어?”
나는 속삭였다.
P. 66
“여러분은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 위로와 동지애를 선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도 아주머니가 했던 입소식 연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모여 그녀 앞에 어수선하게 줄을 섰을 때였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우리의 영웅을 기쁘게 해주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의 봉사로 그분은 신체와 정신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에서 우리의 국경을 위협하는 혼돈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분의 건강과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시장하실 때는 식사를 드리고, 목이 마르실 때는 물을 따라드리고, 그분이 즐기는 모든 일에 활기찬 열정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마음을 다해 들어드리세요. 이때 말을 끊거나 말대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울하거나 비관적이거나 무심한 태도를 보여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손길에 거부 반응을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P. 123
문득 댐이 부서져 물이 쏟아지듯, 감정이 내 몸에 휘몰아쳤다. 이걸 본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하자 속에서부터 히스테리컬한 웃음이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웃는 것뿐이었다.
나는 양광의 시체를 앞으로 던지고서, 자그마한 연꽃 발로 밟았다.
그거 알아? 내가 정말로 양광을 죽였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싱긋 웃었다. 드론의 동그란 프로펠러 위로 바람이 불어와 내 여우 귀 머리 모양이 헝클어졌다. 머리 뒤로 검은 머리카락이 뱀처럼 출렁였다. 나의 척추와 아머로 다시금 기의 파도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나의 얼굴에 수놓 인 기의 경혈이, 타오르듯 끓어오르는 눈빛이 은빛으로 번뜩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껏 단꿈 속에서 너무 오래들 살았지?”
나는 두 팔을 들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악몽을 꿀 시간이야!”
P. 136
이제 이 게임 판의 규칙이 이해됐다.
여자라고 해서 크리살리스 조종에 서투른 게 아니다. 기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훨씬 높은 기력을 지닌 남자의 짝으로 붙여왔던 거다. 남자가 여자에게 밀리는 일이 없도록.
(중략)
나는 창살 사이로 비쳐든 불빛에 손을 들어 올렸다. 빛은 감방을 비스듬히 갈랐다. 지저분한 형광등 불빛 사이로 먼지가 부유했다. 나는 손가락을 구부려 벽 위로 발톱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런 날들 속에서 내가 다시 커지는 꿈을 많이도 꾸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땅 위를 질주하며, 우주를 향해 손을 뻗는 꿈을.
고통에서 벗어나는 꿈을.
구석에 내던져 놓은 찢어진 예복을 바라보았다. 내가 배짱만 있다면 저 옷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옷을 가까이 둘 수가 없었다. 천의 한쪽 끝을 천장을 지나는 배관에 묶고, 다른 쪽 끝을 목에 건 다음 조여오는 올가미 속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열세 차례 밥을 먹어온 지금까지 그런 상상을 했다. 심지어 저 옷자락이 뱀의 똬리처럼 꿈틀대며 움직일 것만 같았다. 뱀의 색이 밝을수록 더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그때, 바닥에 닿았던 맨다리에 묻은 핏자국이 보였다. 이곳에 갇혔던 다른 여자들의 피였다. 그림자에 가려질 만큼 검은 자국은 그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지냈는지 알려주었다. 눌어붙은 채 굳어버린 여자들의 핏자국. 남자 간수들에게는 소름끼치는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난 무섭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과 한을 이해했다.
다만 여기 갇혔던 여자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끌려왔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맞서 싸웠을까? 도망치려 했을까? 아니면 조종사를 즐겁게 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을까?
혹시 그중에는 소리 소문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철의 미망인도 있었을까?
이곳의 공기에는 강렬한 뭔가가 있다. 처절한 저항의 몸짓, 입 다물고 있기를 거부한 목소리, 묶이길 거부한 손, 부서지길 거부한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예복에서 눈길을 거두고 다시 누웠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며 차갑게 서린 여자들의 분노를 가슴 가득 담았다.
웃기지도 않은 얘기다. 우리의 몸을 그렇게도 원하는 남자들이 우리의 정신은 이토록 증오한다니.
P. 335
만리장성이 저 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개황 망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황한 전략가들의 고함이 들렸지만, 지난번처럼 스피커를 떼어내진 않았다.
저들이 겁에 질려 내는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나는 주작을 하늘 높이 호를 그리며 날도록 조종했다. 그리고 망루로 부리를 겨누며 급강하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날 이 꼴로 만들었거나 날 도와주기를 거부한 이들이다. 내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던 자들이니, 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갈 때 가더라도, 나만 가진 않을 것이다. 모두 데려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