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짜장면을 다섯 명이 보고 있다면, 다섯 개의 삶이 존재한다. 짜장면을 보기 전에 각자가 한 경험이 다르고,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짜장면을 보는 관점도 다르고,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다르다. 물론 보편적인 상황이라면 짜장면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알레르기가 있다면? 어제 짜장면을 이미 한 번 먹었다면? 상상하기 싫지만, 짜장면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었다면? 우린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상황에 부닥쳐있다. 그리고 각기의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도 비슷한 듯 다르다. 예컨대 짜장면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었다면,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항의한다. 또, 먹지 않고 바로 나가버리거나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물질을 빼고 계속 식사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본인이 현재 가진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가치관은 새로운 사건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견고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삶은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이다. 때로는 그에 따른 적절한 대처 방법을 알 수도 있지만, 모르는 때도 있다. 충분한 경험을 하지 않아서, 나의 가치관이 아직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못하다면 유의해야 한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사건에 압도당한다. 심할 때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스스로 몰아붙인다.
그런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시간은 한정적이고 모든 걸 경험할 수는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대처할 일은 수없이 많다. 당장 눈앞에 놓인 회사 업무를 처리하거나, 용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좋은 성적을 위해 공부하기도 매우 바쁘다. 바쁜 와중에 아물지 못한 상처는 더 벌어져 곪는다.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의 삶이 아픔이 아닌 행복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음속에 생긴 고름을 빼낼 수 있도록 이 글을 썼다.
여기에 나오는 아홉 가지 삶의 파편들은 그저 눈으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깊은 여운을 준다. 각자가 가진 가치관과 생각들을 마주하다 보면 다양한 울림을 통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도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아픔은 당신이 지금 가진 상처와 완전히 같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지나갔을 수도, 먼 훗날 마주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러한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 안에 있는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거다. 그 빛은 당신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지만, 누구도 대신 찾아줄 수 없다. 상처는 오로지 스스로 치유할 수 있고, 어떻게 어떤 곳을 치료할지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당신 안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이라도 빛을 완전히 삼킬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안에 빛을 갖고 있고, 단지 잠시 찾아온 어둠 때문에 알아채지 못한 것뿐이다.
순우리말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아 더 높이 성장하는, 올라가는 사람을 ‘별하’라고 부른다. 나는 당신이 별하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반짝이는 빛을 내뿜으며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성장한 모습이 되기를 기대한다. 너도, 나도 우리는 모두 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