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거의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듯이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 시대의 거장, 문학의 화신化身
필립 로스를 평생토록 사로잡아온 질문
나는 필립 로스의 솔직함을 사랑한다. 문학에 있어서 그는 나의 영웅이다.
_살만 루슈디(소설가)
모두가 필립 로스가 되길 원했지만, 그 누구도 근접조차 하지 못했다.
_인디펜던트
여기 내가 있다. 소설이라는 변장과 꾸밈과 책략에서 나와 여기에 있다. 여기 내가 있다. 날랜 손재주를 빼앗기고 그간 내가 소설 작가로서 누린 상상의 자유를 부여하던 그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여기에 있다.
_본문 중에서
2018년 5월 22일 타계한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 문학동네에서 2023년 5월 22일 그의 5주기를 맞이해 그가 평생에 걸쳐 치열하게 써온 산문을 집대성한 『왜 쓰는가』를 펴낸다. 『에브리맨』 『미국의 목가』 등의 작품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필립 로스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퓰리처상, 펜/포크너상, 펜/나보코프 상, 펜/솔벨로 상, 전미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미국 예술문학아카데미 골드 메달, 코망되르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미국인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미국문학의 고전을 펴내는 비영리출판사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생존 작가로서 세번째로 완전 결정판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현대 미국문학에는 필립 로스가 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머지 작가들이 있다”(시카고 트리뷴)라는 논평처럼 현대 작가로서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문학적 성취에 도달했다고도 할 수 있는 필립 로스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첫 소설집 『굿바이, 콜럼버스』 이후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까지 서른 권이 넘는 소설을 집필하고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거의 내 삶의 전부”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야말로 문학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왜 쓰는가』는 그런 그가 1960년부터 2014년까지 쓴 창작론, 문학론, 서평, 인터뷰, 대담, 연설문 등을 총망라한 책이다. 다채로운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책에 실린 글은 결국 필립 로스가 평생 동안 몰두해온 주제, 도대체 ‘왜 쓰는가’에 대한 집요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유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필립 로스는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것을 고민해왔고, 그 고민의 과정과 결과가 한데 담긴 책이 바로 『왜 쓰는가』이다. 가히 전투적이라 할 정도로 처절하게 문학적 삶을 살아낸 그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왜 쓰는가』는 21세기에 여전히 읽거나 쓰며, 문학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지평과 함께 커다란 문학적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예술은 인생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독도 인생이고, 명상도 인생이고, 허세도 인생이고, 불평도 인생이고, 사색도 인생이고, 언어도 인생이지요. 문장을 더 낫게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보다 못한 인생인가요? 『등대로』를 읽는 것은 소젖을 짜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것보다 못한 인생인가요?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_본문 중에서
온 생이 문학 그 자체였던 필립 로스
그가 남긴 문학에 대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불멸의 산문들
1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읽으며’는 글쓰기라는 행위와 문학이라는 서사예술에 대한 산문들이 주를 이룬다. 일종의 창작론, 또는 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이다. 거기에 유대계 미국인인 필립 로스는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저항하며 문학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한다. 유대인으로서의 글쓰기, 미국인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 뒤 그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확장하기 위한 하나의 창작 방법론인 ‘무언가가 되기’에 대해 언급한다. 그가 자신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그의 얼터 에고가 되어준 소설 속 인물 네이선 주커먼으로 변신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소설 쓰기의 근본 원리에 대한 힌트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네이선 주커먼은 연기입니다. 그것은 모두 흉내의 기술이에요, 안 그래요? 그게 근본적인 소설가의 재능이죠. 주커먼은 포르노그래피 작가를 흉내내는 의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나는 포르노그래피 작가를 흉내내는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작가를 흉내내는 책을 쓰고 싶어하는 작가입니다—그런 다음에는, 그는 잘 알려진 문학 비평가인 척해서 연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가장자리에 철조망을 치지요. 가짜 전기, 허위 역사를 만들고 내 삶의 실제 드라마로부터 반半 상상의 존재를 지어내는 것이 바로 나의 삶입니다.
_본문 중에서
그는 등장 이후 끊임없이 논란의 한복판에 섰던 작가이기도 하다. 『굿바이, 콜럼버스』를 발표한 직후 자기혐오적 반유대주의자라는 혐의로 유대인 연맹에 맹렬한 비난을 받았으며, 한 유대인 소년의 성적 일탈을 적나라하게 다룬 『포트노이의 불평』은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필립 로스에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유명세와 악명을 동시에 선사하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그는 그런 공격들에 전투적으로 대응했는데, 그 수단은 역시나 글이었다. 그가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라는 혐의에 대해 강력한 논거로 항변하고, 『포트노이의 불평』에 쏟아진 집중포화를 격렬히 방어해내는 글은 뜻하지 않게 선명한 구체성을 띤 문학론이 된다. 우리는 그의 생생히 살아 있는 목소리를 통해 흥미롭게도 문학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에 관한 아이디어는 내 경우는 완전히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다 끝내고 나면 일반적으로 지금 꼴이 갖추어진 것이 이전 소설, 최근의 소화되지 않은 개인사, 내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환경, 내가 읽고 가르쳐온 책들의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게 보이지만요. 이런 경험의 요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화무쌍한 관계에서 어떤 제재가 분명히 나타나고, 그때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붙들 방법을 찾아내지요.
_본문 중에서
2부 ‘업계 이야기─한 작가와 그의 동료들과 그들의 일’은 필립 로스가 인터뷰 진행자로서 만난 인물들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홀로코스트를 겪고 『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명저를 써낸 이탈리아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 전체주의 체제의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의 작품을 쓴 소설가 밀란 쿤데라를 비롯해 에드나 오브라이언, 이반 클리마, 아하론 아펠펠트 등 다양한 사회 조건 속에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들과 나눈 대담들이다. 필립 로스는 탁월한 작가이자 열광적인 독서가인 그만이 할 수 있는 질문들로 대담을 이끌어나가고, 이야기는 각각의 작가들이 개별적 예술가로서 겪는 창작의 고뇌에서 시작해, 집단적 폭력,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 자유주의 국가 등 그들이 속한 세계의 구성원으로서의 예술 행위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어떤 문학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그 문학을 통해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가 이어진다.
신성불가침의 확실성에 기초한 세계에서 소설은 죽습니다. 전체주의 세계는 마르크스를 기초로 하든 이슬람을 기초로 하든 다른 어떤 것을 기초로 하든 질문이라기보다는 답의 세계입니다. 그곳에 소설의 자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요즘 전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해보다는 심판을, 묻기보다는 답하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소설의 목소리는 인간 확실성의 시끄러운 어리석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_본문 중에서
3부 ‘설명’에서는 문학과 함께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시작부터 끝까지 돌아보며 문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산문과 연설문이 수록되어 있다. 마치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진행되는 3부의 첫번째 글 「주스냐 그레이비냐?」는 갓 성인이 되어 문학적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뒤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눈부’시기 위해 거울을 보며 큰 소리로 다짐하는 장면은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가난한 시절 매일 찾아가던 식당, 요리사가 매번 ‘주스? 그레이비?’라고 묻던 그 식당에서 우연히 주운 종이에 정리되지 않은 채 쓰인 열아홉 개의 문장이 그가 이후 평생 써나간 모든 소설의 첫 문장이 되었다는 실제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일화는 꽤나 흥미진진하다.
왜 못하겠는가? 내 아파트에는 나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다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좁았다. 또 매일 아침 욕실에 걸린 거울을 건너다보며 거기에 비친 나의 모습을 향해 큰 소리로 “네가 할 것은 오로지 일뿐이야!” 하고 말할 때 나를 방해할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나에게 있는 모든 자유로운 자투리 시간까지 이용했고, 눈부신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내 야망이 분명하고 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만 하다면, 나의 불굴의 용기가 무한하고 나의 헌신이 무결하고 내가 내 상상력을 온전히 책임지기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_본문 중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작가 필립 로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평생을 그의 문학에 재료가 되어준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심도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긴 글, 문학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인 전망에 대한 글들도 3부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필립 로스’ 항목의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 위키피디아에 보내는 편지글 형태의 「정오표」는 필립 로스의 논리적 글쓰기와 유머 감각이 빛나는 글이다.
필립 로스는 2012년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든의 나이가 된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문학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학사에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 또는 삶의 한 시기에 쏟아내듯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들은 많지만 필립 로스처럼 생애 내내 꾸준히 탁월한 작품을 써나간 이는 많지 않다. 그런 그가 절필 선언 이후 문학으로 이루어진 삶을 복기하며 쓴 산문 「사십오 년 뒤에」와 연설문 「소설의 무자비한 내밀성」은 문학적 삶이라는 긴 역주를 끝마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혜안이 담겨 있다. 자신이 쓴 작품 중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새버스의 극장』을 인용하며 끝나는 「소설의 무자비한 내밀성」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이에게는 마치 선물과 같은 깊은 감동을 준다.
『왜 쓰는가』에서 우리는 평생을 문학에 바친 한 작가의 언어에 대한 사랑, 세계에 대한 통찰, 독창적인 유쾌함, 한계 없는 상상력을 만나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세계와 격돌시키며 사유를 확장해온 문학인이자 “내게 더 큰 고난을 다오”라 외치며 삶을 온전히 경험하고자 했던 한 인간인 그가 써내려간 이 문학론이자 창작론, 그리고 인생론이 담긴 풍요롭고 탁월한 산문을 읽는 것은 필립 로스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거의 모든 진지한 소설가가 증언할 수 있겠지만, 자기 기량의 최고 수준에서도 이 직업이 요구하는 자기 고문의 양은 대개 적지 않지요. 모든 재능에는 조건이 따라붙지요—그 성격, 영역, 힘. 또 기간, 재임 기간, 수명. 수많은 확고한 이유로 거친 모험은 끝이 났습니다. 신음과 환희는 끝이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나는 평생이 걸려 발견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