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에 쫓기며
여성 혐오로 불안을 달래는
한국적 남성성에 대한 전방위적 탐구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보편’이자 유일한 ‘인간’이다. 남성성은 여성성을 비하함으로써 성립된다. “계집애 같다” “너 게이냐?” 같은 말이 남자들 사이에서 욕으로 쓰이는 것은 여성이나 퀴어가 남성성이 없거나 부족한,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로 인정받으려면 남자다운 몸, 남자다운 성격, 남자다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 남자다움의 신화가 깨지고 있다.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가부장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젊은 남자들이 역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일베’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사이버 마초로 변신해 현실과 멀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남성의 역할은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지만 전통적인 지위는 유지해야겠다는 비합리적 사고. 이런 어긋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주의에 필요한 새로운 전략은 무엇인가?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의 두 번째 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는 각기 다양한 지적 배경에서 당대 한국 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필자들은 한국 남성의 현재를 다각도로 분석하면서, 남성다운 몸 ․ 심리 ․ 문화는 현실이 아닌 규범이자 신화임을 밝힌다. 일제 강점기 이광수와 김유정과 이상 같은 남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식민지 남성성’의 기원을 확인하고, 그동안 남성성의 목록에서 지워졌던 레즈비언과 트랜스남성(female-to-male)의 남성성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고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남성성의 위기와 가부장제의 쇠퇴에 관한 담론은 페미니즘의 주요 관심사이다.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적 경제 위기가 심화된 결과, 근대적 남성성의 핵심인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의 역할은 불가능해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 경제는 외벌이로 지탱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자란 아들들은 이제 더는 여자를 먹여 살리는 것을 남자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사회가 원하는 성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남성으로서 성 역할이 점점 불가능해졌는데도 남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한국 남성의 현재를 다각도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련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 <들어가는 글>(권김현영) 중에서
‘한국 남자’는 어쩌다 욕설이 되었나?
― ‘남자의 위기’ 담론과 ‘남자다운 남자’의 허상을 넘어,
한국의 지배적 남성 문화를 분석하는 새로운 인식론과 방법론
인류 역사상 남성은 언제나 인간 보편이자 ‘일반’이었고 여성은 항상 보편의 ‘특수’로 존재해 왔다. 여성은 ‘여비서’ ‘여교사’ ‘여기자’처럼 ‘여성’이라는 특수의 위치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남성은 노동자, 시민, 유권자, 청년으로 불리며 보편을 대표해 왔다. 보편이 아니기 때문에 잊히고 묻힌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여성성 연구의 한 방식이라면, 남성성 연구는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바로 그러한 남성성 연구, 특히 한국 남성성 연구의 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6명의 필자들은 역사와 문화를 넘나들고, 문학과 철학, 인류학을 바탕 삼아, 한국적 남성성의 기원에서부터 오늘날 전통적 남성성과 변화한 현실 사이에서 분열하는 남성들의 모습까지 한국 남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한다. 나아가 보편이 아닌 차이로서 ‘남성성들’의 목록을 다시 설정하고자 한다.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정희진)은 이른바 ‘남자답지 못한 남자’가 여성을 더욱 억압하는 종속적(주변적) 남성성,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시론이다. 여기서 정희진은 먼저 근대 자유주의부터 후기 구조주의까지 ‘남성성’을 분석하는 기존 여성주의 이론들을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이론으로는 한국적 남성성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 정신’이자 문화 권력으로서 ‘식민지 남성성’에 주목한다.
한국의 지배적 남성 문화의 성격을 ‘식민지 남성성’으로 규정하는 정희진의 글에 이어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에서 바로 그 ‘식민지 남성성’의 역사적 기원과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전환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별 이분법적 담론이 등장한 배경과, 근대적 의미의 보편적 개인이 될 수 없었던 식민지 남성의 위치를 고찰한다.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루인)은 세계사와 20세기 한국사를 넘나들며 ‘남자다운 몸’, 즉 음경을 중심으로 한 신체적 ‘남성성’의 규범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 ‘근대 남성 신체 발명기’이다. 한국의 경우, 특히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산업 발전과 군국주의 기획의 일환으로서 ‘남성성’이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것은 징병 신체 검사의 항목들과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억압에서 잘 드러난다.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엄기호)은 신자유주의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한국적 남성성의 양상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분석한다. 성차별적 현실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남자도 피해자라며 항변하고 스스로 ‘찌질함’을 내세우는 젊은 남성들이 나타났고, 그러자 이들을 비판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성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한채윤)과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준우)는 흔히 남성성이 없거나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는 레즈비언과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남성성’의 실체를 거꾸로 재구성하게 도와준다. 한채윤은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레즈비언에 대한 편견(“레즈비언은 남자를 혐오하거나 선망해서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핵심에 남성성은 남자만 소유한다는 관념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한다. 한채윤의 글이 ‘여자의 남성성’을 설명한다면, 준우의 글은 ‘평범한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남성의 욕망을 분석한다. 특히, 준우의 글은 다섯 명의 트랜스남성들과 심층 면접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의 언어를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 정치적 제도로서 ‘남성성’과 한국의 남성성에 대하여
남자는 어떻게 ‘남자다움’이라는 속성, ‘남성성’을 체화할까? 한국 남성과 미국 남성의 ‘남성성’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왜, 어떻게 다를까?
이 글에서 정희진은 권력 관계이자 정치적 제도로서 ‘남성성’의 의미를 살피고 서구 여성주의 이론의 남성성 연구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 여성주의 이론으로는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의 남성성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자신을 ‘강대국 남성’과 ‘한국 여성’에게 동시에 당하는 이중의 피해자로 여기는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고찰 없이는, 성 평등을 두고 한국 남성들이 보이는 전반적인 문화 지체 현상과 온라인의 혐오 문화를 제대로 분석하고 논의할 수 없다.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말할 것도 없이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속성(‘합리적인’, ‘감성적인’…)은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성별을 불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성다움/여성다움이라는 표현을 수시로 사용하지만, 그런 현실은 없다. 실재냐 부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임의적이라는 의미다. …… 여성주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위계와 차별을 주로 비판하지만 이는 비장애인, 성인, 이성애자에게만 적용되는 특권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성별성은 정상성을 향한 욕망일 수 있다. 최근에는 분리 설치된 경우가 많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 많았다. 이는 성별 구분을 전제로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인간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43~44쪽)
‘남성의 위기’와 ‘여성 상위’라는 거짓말
어느 시대나 지배적 남성성의 핵심 요소는 앞 시대의 남성성과 겹치거나 재구성되고 재결합된 인용의 결과들이다. 남성 권력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를 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boundary setting)을 의미한다. 각각의 남성성들은 상호 배반하거나 불일치하고 양립하지 못하는 것들이 모순적인 짝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남성성의 변화나 대체가 남성 권력의 쇠퇴나 변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시대에나 출몰하는 ‘남성의 위기’ 담론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남성성 중 하나가 다른 남성성으로 교체될 때 나타나는 남성 문화의 반응인데, 젠더 이분법에서는 이를 ‘여성 지위 향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남성 내부의 차이로 ‘대세’ 남성성의 이미지가 바뀐 것인데, 남성 사회는 이를 ‘여성 상위’라고 주장한다. (48쪽)
남성도 피해자일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한 남성은 ‘조작된 이미지’이므로 남성도 피해자일까? 요점은 피해자냐 피해자가 아니냐가 아니다. 남성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자신의 문제점에 대한 변명과 해결의 논리가 있다. 괴로운 일상의 원인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 때문인데, 여성들에게 문제를 전가한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는 남성 연대를 활용한다. …… 남성은 자신도 남성성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스스로 남성 문화를 바꾸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서구의 경우 극소수이고 한국에는 없다. (55, 56쪽)
식민지 남성성 – 강대국 콤플렉스와 자국 여성 착취
한국 남성은 역사상 한 번도 외세와의 관계에서 한국 여성을 보호한 적이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소유한 여자를 적에게 빼앗긴 자존심의 상처를 다시 한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나 구타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혹은 한국 여성에게 이러한 자신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강요한다.(많은 ‘군 위안부’ 여성들이 일제의 만행‘보다’ 해방 후 귀국하여 당한 가족 내 따돌림과 남편의 구타가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한다.) …… 식민지 남성성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성별과 정체성 등 존재의 모든 이슈를 강대국과의 관계로만 환원하는 논리다. 미국을 대타자(the Other)로 설정하고 자신의 모든 문제는 그들 때문이라는 전가와 투사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에게 ‘당하는’ 이중의 피해자다. (63, 64쪽)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 제국주의 남성성과 식민지 남성성의 위치
권김현영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남성의 ‘남성성’은 근대 전환기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전환기에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남자다움이란 결국 ‘어떤 남자와 동일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에게는 동일시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조국’이 사라졌으므로 본받을 ‘아버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스스로 새로운 근대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남성들은 피지배 상황에 놓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제국 일본의 남성성에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시도하거나, 식민 지배 상황을 안정화하려는 제국 남성들과 공모해 일본 여성과 혼인을 꿈꾸거나, 식민지 조선 여성에게 기생해 살아가면서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권김현영은 이광수 · 채만식 · 이상 · 김유정 등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본다.
근대 전환기 식민지 남자들의 처지
식민지 조선의 소년, 청년, 혹은 ‘모던보이’들에게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모던보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다시피 식민지 조선 남자라는 위치는 조선의 아버지들과의 단절과 함께 근대 문물을 가져온 제국의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각되고 각인되었다. 귀족의 기사도를 승계하면서도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규범 속에 다시 새겨 넣는 과정을 거쳐 아버지-아들 간의 적대적 동일시와 승화를 이루어냈던 서구와는 달리, 식민지 조선의 남성성은 어떤 것도 승계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78쪽)
1920년대 식민지 남자에게서 2017년 ‘한국 남자’를 보다
김유정은 1928년 일개 학생 신분으로 당대의 스타였던 박녹주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기행을 일삼는다. 해방 후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던 박녹주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유정의 구애 사건이 이상스러우리만큼 자세하게 장안에 요란히 퍼졌다며 의아해하는데, 그가 밝힌 김유정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 내내 섹스를 졸라대다가 끝내 거절하면 저주를 퍼붓고야 마는 ‘한국 남자’에 대한 ‘고발’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이다. (88, 89쪽)
“아아 님은 갔습니다” - 제국의 남성 앞에서 ‘여성’의 위치에 선 남자들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의 위치를 타자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여성의 위치를 점유하여 자신의 위치를 피해자로 정한 후, 피식민지 여자들을 피식민지 남자들을 위한 ‘자원’으로 만든다.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은 피해자이자 약자로서 위치를 점유하며 자신을 ‘여자만도 못한 존재’라고 자기 비하를 일삼는 습관이 있다. 여자에게 기생한다며 처지를 비관하는 피식민지 남자는 남자가 아닌 자, 즉 여자가 된다. 이때 이중으로 비하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자이다.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 “아아 님은 갔습니다.”라고 노래하면서 식민 상황에 놓인 남성들의 곤경을 숨기는 모습은 식민지 남성성의 핵심적 표상이다. 식민지 남성성은 자신을 여성화함으로써 식민주의자 남자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점을 부인하고,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결핍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95, 96쪽)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 외과 의학과 군대를 통한 ‘남성’ 몸 만들기
루인의 글은 근대적 남성 신체가 발명되어 온 과정을 세계사와 한국적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두루 살핀다. 이를 위해 먼저 근대 유럽에서 외과 의료 기술을 통해 ‘남성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살피고, 음경과 ‘남성 몸 되기’의 관계를 인터섹스의 경험을 중심으로 탐구한다. 인터섹스는 의료 규범상 여자의 몸이나 남자의 몸에 부합하지 않거나, ‘여성의 생물학적 특질’과 ‘남성의 생물학적 특질’이 섞여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병역을 위한 신체 검사가 ‘남성 몸 만들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것이 ‘남성성’을 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인한다.
보편이 된 백인 남성의 몸과 열등한 몸의 발명
(젠더화된) 인종 발명과 인종 간 해부학적 차이의 발명은 19세기 초반과 중반 아프리카 부시족 여성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한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흑인을 비롯한 비(非)백인을 노예로 매매하고 비백인이나 장애인과 같이 백인 남성과 ‘다른’ 몸을 쇼 무대에 올려 전시하던 그 시기에, 부시족 여성은 현생 인류로 진화하기 이전 단계의 인류로 전시되었다. 유럽인은 이 여성을 비유럽 지역의 ‘기이함’, ‘낯섦’, ‘미개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 차이를 발명하고 증명하기 위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의료 사기는 인종 차이를 해부학적 ․ 과학적 사실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기준과 규범은 백인 남성의 몸이(었으)며, 그 외의 몸은 과학적으로 ‘다른’, 열등한 몸이 되었다. (119쪽)
외부 성기로 증명하는 ‘남성의 몸’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의료 기술, 의학의 기준을 통과한다. 흔히 진짜 여성 혹은 남성이라 불리는 젠더 범주 역시 출생 당시 의사의 승인을 거쳐 여성이나 남성으로 지정된다. 때로 인터섹스로 인지된다고 해도 서둘러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지정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해진다. 그러니 의료 기술 기획을 통과하지 않는 섹스-젠더는 없으며 외과 기술로 가공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내’가 외과 기술을 거치지 않은 ‘남성’이라면 이 말은 신생아일 때 의사가 ‘나’의 외부 성기 형태를 힐끗 본 다음 적절한 크기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즉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남성’(혹은 젠더)이란 의학이 보증하는 남성인 동시에 생물학이나 의학을 통해 제대로 확인/검사하지 않은 남성/몸이다. (134, 135쪽)
군사 정권의 ‘국민’ 관리, 그리고 남성성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의 또 다른 주요 목적은 남성성 관리였다. 군인인 남성을 만들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주민 등록 제도를 시행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몸을 군인으로 승인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즉 어떤 몸이 국민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근대적 남성성을 재현할 수 있는지 가려야 했다. 주민 등록상 남성으로 분류되는 이들 모두가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제한된 이들만 군대에 간다. 즉 남성 내에선 특권층에서 배제되지만 남성/비남성 위계에선 특권적 지위에 있는 남성이 군대에 간다. 군 입대는 특권층은 아니지만 비남성도 아닌 위치의 남성을 표지하는 방식이다. (140~141쪽)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 ‘루저’와 ‘남성 페미니스트’의 탄생
2016년,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여성 혐오에 맞서 20~30대 여성들이 공론의 장에 나서자, 남자도 피해자라고 항변하는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찌질하다’고 고백하면서 이제 남자는 기득권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 남성들을 비판하는 또 다른 젊은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서 인권이라는 보편의 언어로 ‘찌질한 남성들’을 비판했다. 엄기호는 ‘찌질한 남성’과 ‘페미니스트 남성’ 둘 다 이전 세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라는 데 주목하고 두 남성성의 등장 배경과 의미를 탐구한다.
기득권자 대 피해자
과거라면 자신이 찌질하다는 것을 감추려 하거나 찌질함마저 남성다움(manliness)의 일부로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찌질함을 남성다움의 일부로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이 시대의 보편적 남성성(masculinity)이라고 정의하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 이들이 남성은 이제 기득권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한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의 남자라면 자기가 여자에 비해 손해를 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남성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라 감추겠지만 자신들은 더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들은 과거의 남성 기득권자 마초와 동일하지 않은 존재다. (157~159쪽)
평등의 문 앞에서 엎어지다 - ‘찌질이’라는 속물
연애든 결혼이든, 그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이미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섰다. 나누지 않는다면 관계는 유지될 수 없으며,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한 그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배분하고 함께 짊어지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약하고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인정이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성의 거세, 혹은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머뭇거리고 웅얼거리고 투덜거리거나 ‘거래’를 요구 ― 내가 모든 여행 경비를 제공했으니 당일에 올라가자고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경제와 섹스를 교환할 것을 요구하는, 지루할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 말이다. ― 하는 것으로 만회하려다가 찌질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171쪽)
‘페미니스트 남성’들에게 묻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키려 한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 정희진과 권김현영에 따르면 여성주의는 남성들이 독점한 보편성의 언어에 저항하며 지식의 맥락성과 국지성을 강조한다.(물론 이때의 맥락성과 국지성은 국민국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여성주의는 보편과 쉽게 화해할 수 없다. 보편의 헤게모니와 당파성을 질문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183, 184쪽)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 레즈비언의 ‘남성성’은 가능한가
한채윤의 글은 레즈비언의 남성성에 주목하여 남성성의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남성 혐오증이 있어서 남자 대신 여자를 사귀는 여성이거나, 남자를 강하게 선망하여 남자 흉내를 내며 다른 여자와 사귀는 여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정상적인 여자라면 당연히 이성애를 하는데, 레즈비언은 남자를 혐오하고 선망하는 삐뚤어진 욕망으로 인해 본능을 거스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채윤은 레즈비언의 남성성 분석을 통해 이성애 성 규범에 포섭되지 않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남성성의 확장을 시도한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선망이라는 착각
레즈비언이 남성성을 모방하거나 혐오한다는 분석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첫째, 원래 여자에게 남성성은 없다. 남성성은 남자만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남성성이 없는 여성은 바로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끌린다. …… 그런데 선입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질문해보면 비논리적인 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여자에게는 남성성이 정말 없을까? 아니면 없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 어떤 여자에게 남자만큼의 남성성이 있다면 그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여자는 왜 굳이 남성성의 결핍을 메꾸려고 하는가? (188~189쪽)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남성성은 생물학적 성별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거나, 자신의 성별을 남성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남성성이 저절로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부치(butch)와 트랜스남성은 남성성이 얼마나 쉽게 복제 가능하고, 변용 가능한지, 그래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며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어도 남성성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섹스와 젠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199쪽)
여자와 남자, 동성애와 이성애… 모든 이분법을 넘어
우리는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동성애 역시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도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성애를 일컬어 동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도 정상임을 설명하려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순간, 이성애는 아무런 검토나 증명 과정 없이 ‘정상’이 된다. 그래서 동성애와 이성애의 유사함이 강조될수록 오히려 동성애자의 실체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 차별은 차이로 인해 자연 발생 하는 것이 아니며, 평등은 그 차이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209, 210쪽)
적정량의 남성성은 얼마만큼인가?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렇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난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일까? (212쪽)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 트랜스남성의 ‘보통 남자’ 되기
준우의 글은 트랜스 남성 다섯 명을 직접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트랜스남성의 남성성을 고찰한 것이다. 필자는, ‘여성으로 살았던’ 경험을 가진 트랜스남성들 중에 한국 보통 남성들의 남성성, 이른바 ‘한남’의 남성성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마초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많은 것에 의문을 품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트랜스남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특별함, 즉 차이를 지우고 ‘보통 남자’로서 확인받고자 한다. 그렇다면, 트랜스남성들이 지향하는 ‘평범한 남자’란 대체 누구인가? 트랜스남성들의 욕망과 남성성의 수행 과정을 통해 ‘평범한 한국 남자’, 보편을 대표하고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간주되는 남성성의 정체가 드러난다.
‘남성 되기’의 전제 조건 - ‘여성’의 흔적 지우기
트랜스남성은 남에게서든 자기 자신에게서든 끊임없이 “너 여자 아냐?”라고 의심하는 질문에 그렇지 않음을 입증해야 하는 삶을 산다. 트랜스남성은 여성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지 자신을 더욱 엄격히 검열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 여성으로 양육된 경험이나 여학교에 다닌 경험 등 ‘여성으로 살았던 경험’을 전부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 경험은 완전히 버리고 싶더라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무언가로 남는다. 여성으로 살았던 과거를 간직한 채, 현재의 자신을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평범하게 보일 남성으로 정체화하기 위해 애쓰는 점이 트랜스남성성의 큰 특징이다.
(218~219쪽)
남성 간 유대 관계에서 ‘남성 되기’
인철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공동 생활을 한다. 그에게 회사 기숙사는 남성성을 재사회화하기 좋은 공간이다. …… 자위 경험 공유, 성적 능력 과시, 여성의 대상화 등은 남성 집단을 끈끈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남성끼리 나누는 ‘몇 명과 자봤다’, ‘하룻밤에 몇 번을 사정했다’, ‘내 물건은 크고 굵어서 상대 여자가 힘들어 죽는다’ 따위의 말 상당수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다. …… 트랜스남성들은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집단 내 위계에 소속됨으로써 보상받는다. 위계 서열에 소속되는 것은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맥을 유지하는 중요한 생존 수단이 됨과 동시에,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일원의 자격, 즉 평범한 성인 남성의 위치라는 사회적 남근인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223, 224쪽)
낭만이자 권력인 남성의 ‘몸’
이상적인 남성성은 정치적 맥락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사회적 담론이 변하면서 계속 바뀐다. 그래서 남성성은 그 누구도 100퍼센트 이행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열등한 위치에 있는 남성 집단일수록 더 강하게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획득하고 실천하기를 열망한다. 이때 남성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몸이 규범에 적합한지, 즉 얼마나 남자다운 몸을 갖추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다수의 트랜스남성은 몸의 상태가 규범적 남성의 이미지, 즉 보통 남성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남성 되기의 척도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은 의료적 조치(호르몬 투여, 가슴 제거 수술, 생식 능력 제거, 페니스와 고환의 외형을 만드는 수술 등)를 통한 트랜지션(transition) 과정을 선택한다. (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