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왜 지금, 이 문장이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는가
직장인이라면 경험했을 것이다. 상사의 요구에 마음속으로부터 불끈 치밀어오르는 이 말을. “안 하는 편이 백 번 낫겠습니다” 혹은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부분 이 말을 삼킨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 책을 만들면서 바틀비의 말을 내심 응원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필경사 바틀비’는 왜 출근 3일째부터 고집스럽게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유를 파고든다. 소설은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로 끝을 맺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소설이 쓰인 19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분분하다. 베일에 싸인 바틀비의 삶의 궤적만큼이나 명쾌한 해석을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외로워 보이는’ 바틀비
그렇지만 위의 문장이 가슴속으로 통째로 들어오면서 바틀비의 행위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번 아웃’이 아니었을까. 결코 전달되지 못할 ‘죽은 편지들’(죽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수합하고 불태워야 했던 전의 직장, 법정의 언어들을 하루 종일 365일 베껴 써야 하는, 또 하나의 죽은 노동인 현 직장을, 생명 있는 사람이 어떻게 견뎌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바틀비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고 싶어요!”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꼬끼오!」, 「총각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
흰눈을 맞으며 끊임없이 톱질하는 톱장이 메리머스크와 그의 황금빛 수탉의 이야기 「꼬끼오!」, 백지처럼 시들어가는 처녀들과 사치스러운 변호사들의 세계를 대비시킨 「총각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 이 소설들에도 ‘노동’이 흐른다. 어떤 노동은 비참하지만, 돈으로 환산되어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바틀비와 메리머스크의 동질성이다. 반면에 폐에 켜켜이 쌓이는 분진을 의식하지 못하는 처녀들의 노동은 가엾다. 참담하다. 이처럼 멜빌은 자본주의가 무르익기 시작하는 19세기 미국 사회의 이면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조지 오웰’ 작품번역으로 정평이 난 박경서 교수가 공들여 번역했다.(2022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