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소원은 죽음입니다”
캐나다 최초로 조력 사망이 실행되던 해,
한 의사가 써내려간 특별한 기록
2022년 9월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 주자,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죽음(향년 91세)은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가 여생을 보내던 스위스에서 의사의 처방을 받은 약물을 직접 복용해 사망하는, 이른바 ‘조력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뇌졸중으로 투병을 이어온 배우 알랭 들롱 또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길 원한다며,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에 머물고 있다는 보도가 전한다. 우리는 어떤가. 스위스 디그니타스(비영리 조력 사망 지원단체)에 따르면 2022년까지 조력 자살을 선택한 한국인은 3명이며 100여 명 남짓한 신청자들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국회에서도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어(2022년 6월, 안규백 의원) 조력 자살을 둘러싼 국내의 논의에 불을 지폈다.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 제목처럼 죽음은 마침내 ‘네 멋대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된 것일까? 유명인의 죽음이나 법안 발의를 계기로 하지 않더라도 삶의 끝을 통제하고 싶다는 바람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일 것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순간 어디에 머물지, 누구와 함께 있을지, 어떤 대화를 나눌지 결정할 수 있다면 삶의 마지막을 마주하는 고통을 덜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법안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률(82퍼센트)에도 불구하고 조력 사망 제도화를 둘러싼 우려도 여전하다. 자칫 생명의 ‘존엄성’을 침해하며 의료취약 계층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모두에게 평등하고 ‘존엄한 죽음’은 불가능한 것일까?
2016년 캐나다 최초로 조력 사망 회복 불가능한 말기 환자 등 특정 요건에 부합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약물 주입을 비롯 의료진의 도움을 통해 이르게 하는 사망. 캐나다 의료계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의료조력 사망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다.
이 실행되던 해, 그 최전선에 있던 스테파니 그린 박사가 쓴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는 의료조력 사망MAiD의 근접 관찰 보고서로서, 특별한 죽음의 현장을 생생히 전한다. 환자들이 이러한 죽음의 방식을 원하는 이유에서 신청 기준, 시행 절차, 임종의 모습 등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나아가 생경한 작별의 순간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 그 속에서 차오른 복잡다단한 감정이 저자의 개인사와 함께 촘촘히 직조된 이 책은 논쟁적인 주제를 충실히 다룬 논픽션이자 잘 쓰인 에세이로도 손색이 없다. 그린 박사는 독자들을 자신이 자리한 방으로 데려가 환자, 의료인, 스스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죽음을 보는 시각뿐 아니라 실행에 관한 현실적 문제, 의료윤리 등의 맥락을 두루 살피게 한다. 그가 기록한 성공과 시행착오, 의의와 우려는 안락사 제도화 이전 우리가 살필 풍성한 체크리스트를 제공한다.
내 환자들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그들이 나눈 기이한 마지막 대화, 남편과 아내가 속삭인 사랑의 말들, 엄마와 자식의 눈물 어린 작별, 조부모가 손주에게 한 마지막 조언의 목격자였다.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친구들과 가족이 모여서 건배하는 가운데 자기 삶의 궤적을 회상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죽을 날짜와 시간을 알면 마지막 말과 행동을 심사숙고해서 계획할 수 있다. _「들어가며」(16쪽)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실행되는가?
의료조력 사망 제도 최전선의 생생한 이야기
MAiD가 합법화되기까지 캐나다 또한 조력 사망을 둘러싼 소송과 판결, 논쟁의 긴 여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린 박사는 자신의 의대생 시절부터 전문의로서 경력을 쌓아온 현재까지 조력 사망 합법화의 주요 국면을 마련한 사건들을 전하며 이를 보는 자신의 관점과 여론의 변화를 중계한다. 1992년 루게릭병을 앓던 수 로드리게스는 조력 사망을 금지하는 법에 이의를 제기하며 발언을 담은 영상―“내가 나의 죽음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몸은 누구의 몸이란 말입니까? 누가 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거죠?”―을 캐나다 의회에 보냈지만 그의 의견은 수용되지 않았다. 2000년대로 넘어온 시점에는 케이 카터 사건으로 캐나다 전역이 떠들썩했는데, 척추관 협착증을 앓던 그는 이 병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한다며, 삶에 통제권을 갖겠다고 선언하고 2010년 스위스로 건너가 조력 사망을 맞이한다. 이후에도 글로리아 테일러 소송 등 여러 사건을 목도하며 대중의 감정은 변화했고 마침내 대법원은 2016년 카터 판결로써 조력 사망 금지 조항을 폐지한다. 그렇다면 MAiD는 원하는 사람 누구나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인가?
캐나다 법은 MAiD 적합성을 엄격하게 규정한다. MAiD를 받기 위한 요건 중 ‘위중하고 치료 불가능한’ 질병을 앓아야 한다는 것이 있는데, ‘위중하다grievous’라는 말은 극히 심각하고 기능에 의미심장한 쇠퇴가 있는 상태를 뜻하고, ‘치료 불가능한irremediable’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치료가 안 된다는 뜻이다.
이는 환자가 고통을 견딜 수 없어하고 자연사가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할 것을 포함한다. 이런 기준이 법률에 명시되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시행되어왔다._「첫번째 환자, 하비」(29쪽)
조력 사망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하지만 캐나다를 비롯해 이를 제도화한 여러 국가에서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캐나다의 경우 환자가 18세 이상이어야 하며, 의사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고, ‘위중하고 치료 불가능한’ 고통을 겪고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실제로 그린 박사가 만난 환자의 65퍼센트 이상이 전이성 말기 암 환자였다). 환자가 MAiD를 신청하면 조력 사망 전문의는 적합성 여부를 심사하며, 그가 조건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10일간의 숙려 기간과 절차 직전 최종 동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시행 초기의 혼돈은 불가피한 것이어서 조력 사망 전문의들 가운데에서도 ‘무엇이 위중하고 치료 불가능한 고통인가?’에 대해 이견은 존재해왔다. 또한 환자가 명백히 기준을 충족한다 해도 실행 과정에서 난관도 뒤따른다. 가령 MAiD에 거부감을 가진 약사들이 약물 조제를 거부하거나 2차 의료기관의 의료인이 소견서 작성에 비협조적인 경우 등이다.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히면서도 그린 박사가 점차 MAiD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의사들과의 협력뿐 아니라 환자들의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충만한 경험 덕분이었다.
남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도록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다
“선생님은 어머니께 우리 중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주셨어요”
사람들이 조력 사망을 원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질병으로 인한 극한의 통증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일까? 더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을 때일까? 혹은 알츠하이머 등으로 인지능력이 저하될 때일까?
그린 박사의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이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자율성과 자존감을 잃은 것과 관련된다. 누군가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 삶에 의미나 기쁨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에서 깊은 회의를 느낀다는 것이다. 말기 환자들은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울 뿐이라면 평온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의식이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죽고 싶다고 말한다. 폐암 환자로 화학요법을 3차까지 시도했지만 온몸이 혹으로 뒤덮인 채 ‘총체적 통증 위기’에 시달리던 레이는 죽음을 원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통증 완화 관리를 받고 있으면서도, 병세가 악화되어 의식 없는 상태로 시간을 끌다 죽는 상황을 그는 극도로 두려워했다. 다행히 레이는 조력 사망 기준에 부합했고 호스피스 병동 루프탑으로 침상을 옮겨 가까운 친구 3명 곁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간부전, 다발성 경화증, 흑색종 등 그린 박사가 만난 환자들이 앓는 질병은 다양했지만 이들이 조력 사망 적합자임을 알게 된 순간 보인 반응은 공통적이었다. 삶의 끝에 통제력을 갖게 되자 그들의 고통은 줄어들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남은 삶을 사는 데 집중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정된 죽음 앞에 떠나온 삶을 충만하게 수용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저자는 말한다. “MAiD는 죽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산부인과 전문의에서 조력 사망 전문의로
스테파니 그린 박사가 함께한 환자들의 마지막
준비된 애도는 상실의 고통을 덜어준다
흥미롭게도 저자 스테파니 그린은 이 일을 하기 전 응급 대기를 하며 아이를 받아온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삶을 향한 여정을 돕던 그가 정반대로 죽음을 향한 여정을 돕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생명의 탄생을 지켜본 그린 박사였기에 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경험은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죽음의 과정을 돕는 독특한 위치의 외부인으로서, 내밀한 임종 현장을 목격하며 그가 기록한 환자들의 마지막은 저마다 개인의 삶을 요약하는 한 편의 드라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 곁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환자들, 황망해하면서도 죽음을 마주한 이에게 사랑을 표하고 그를 필사적으로 기억하려는 몸짓들…… 케이티의 가족은 그녀를 기억할 물건이나 일화를 돌아가며 소리 내어 말하는 의식을 치렀고, 리처드의 아내 메그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키스하며 남편의 몸을 품은 채 그를 떠나보냈다.
물론 마지막 순간이 모두 화해와 추억이 오가는 아름다운 자리만은 아니다. 헬렌은 자신이 키워온 손자의 막돼먹은 행실에 분노하며 임종의 순간에도 입바른 말을 하고 “건실하게 살라!”고 훈계한다. 앤이 약물 주입 후 약간의 의식이 남았을 때 그의 딸 질은 또렷하게 말한다. “용서할게요, 엄마, 그 모든 것을.”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조차 준비된 죽음이기에 허락될 수 있으며, 고유한 마지막 순간들은 그린 박사에게 잊지 못할 소회를 남긴다는 점이다.
삶을 완성할 인간다운 죽음을 향하여
더 나은 죽음을 제도화하기 위하여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결정된 이후 2023년 현재까지 160만여 명이 연명의료 중단 의향서를 등록했지만, 우리 사회 내, 더 나은 죽음을 향한 논의는 아직 더디다. 말기 질환으로 삶이 산산이 조각나버린 환자에게 삶의 마지막 통제권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조력 사망이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존엄한 마지막을 위한 윤리적, 제도적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한 아주 특별한 선택들이 담긴 이 책은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게 할 디딤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