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

신에게 몸을 빌려준 아버지

린처리 | 글항아리 | 2023년 09월 0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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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신이 된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기록한 딸

신이 자기 몸을 벗어나 아버지에게 들어갈 때면
아버지 몸속의 한 칸이 마치 그릇처럼
영혼의 자리를 신에게 내어주었다
신이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래서 영혼과 신이 터널을 오갈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웠다
그 순간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신이었다


무속인의 딸이 써내려간 10년간의 기록

“아버지가 아침 식사를 막 마치자 신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신으로 빙의되어 두 손에 칠성검과 자구刺球를 들고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향불 가운데 새벽부터 줄을 선 사람들을 위해 나무 의자에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청향淸香 세 대와 십이간지, 성별 카드를 손에 든 신도들의 액운을 하나하나 끊어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빛은 굳건했고, 검은색 천 단화를 신은 두 발로 진지하게 칠성보법을 밟았다. 위풍당당한 자신감과 기세가 온몸에 흘러넘쳐 키가 170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아버지는 거대해 보였다.”

이 책은 신에게 빙의되어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체로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해결하고자 한 “아버지 신”을 딸이 지켜보며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뭔가가 아버지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그는 다른 사람, 즉 신이 되었다. 신이 존재할 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걸 알았다. 집 거실에서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그녀는 신들이 아버지의 몸을 통해 인간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엔 친숙한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낯선 사람들이 점점 집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은 이내 더 많은 낯선 사람을 데리고 왔다.
“지금 때가 안 좋은지 사업에 실패하고 밑천만 까이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 딸이 여행한 뒤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요. 병원에 가도 소용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별의별 난제가 탁자 위에 올라왔다. 생로병사, 실업, 진학, 결혼 문제…… 그러면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짚으며 점을 쳤다. 결과가 나오면 붓을 붉은 먹물에 찍은 뒤 노란 종이에 신비로운 문자와 그에 어울리는 부호를 그렸다. 건네줄 때는 이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라거나 금로金爐 주위를 세 번 돈 다음 태워서 그 재를 음양수로 만들어 몇 모금 마시라고 했다. 혹은 부적에 불을 붙여 주문을 외우며 상대의 머리 위에 빙빙 돌렸다.
“신의 말씀을 공경히 청하나이다. 아무개는 본명궁本命宮 몇 세이며 이러이러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말을 마치면 다시 붉은 먹물을 묻힌 붓으로 이마에 부호를 그리거나 점을 가볍게 찍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궁금증과 고민을 다 해결하면 이제 신이 물러날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두 팔을 한번 들었다 내리며 안쪽으로 구부렸고 치아 사이로 천천히 숨을 뱉어냈다. 긴장이 풀린 몸을 앞으로 살짝 구부린 다음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리면 어머니가 따뜻한 인삼차를 건넸다. 아버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차를 천천히 몸속으로 흘려넣으며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아버지를 봤지만 저자는 의심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집에 발걸음하는 이들 중에는 독실한 신도들도 있었지만, 또 다른 많은 이는 욕망을 끝없이 내비쳤다. 이들의 욕망은 때로 아버지의 신성한 힘을 압도했다. 이 책이 신의 영역을 다루면서도 인간 세속으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입은 한 남자와 그 딸에 관한 오랜 서사를 풀어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버지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아버지는 갑자기 신이 되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누나 집을 방문한 어느 날이었다. 조카딸이 아파 몸져누워 있었고 의사의 치료를 받았지만 소용없었다. 절망에 빠진 누나와 조카를 보더니 아버지는 갑자기 고대 민난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유하이遊海이고 스무 살이오. 그대의 동생은 내 주군이오. 린 씨 집안에 보은하고 싶소만 나도 아직 정식 신은 아니라서 말이오. 딸을 어서 마전궁에 데려가고 마왕야에게 유하이의 소개로 왔다고 하시오. 그대의 딸은 코에 종양이 있소. 마왕야에게 약을 지어달라고 해서 먹으면 금방 나을 것이오.”
유하이의 말대로 마전궁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더니 이것을 먹고 조카딸은 씻은 듯이 나았다. 첫 빙의가 이렇게 찾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몸에 생긴 변화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우연히 발생한 기이한 사건으로만 여겼다. 얼마 후 아버지의 친구가 법사를 만나러 가면서 아버지를 데려갔다. 아버지는 신을 믿지 않아 구경이나 하려고 따라갔건만 그곳에서 또다시 빙의되었다. 당시의 주신은 지부천세池府千歲였는데, 법사들이 아버지 몸에 붙은 성황신을 악령으로 오해해서 때리자 아버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호통쳤다. “이 어리석은 법사들아, 너희가 나를 얼마나 아느냐? 너희가 이렇게 나를 억누르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느냐?”
유하이 성황신이 처음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 신과 완벽히 통하지 못했다. 신의 계시는 언제나 갑작스레 내려와 젊은 아버지의 삶도 함께 화를 입었다. 게다가 당시 유하이는 저승의 일을 판단할 지지地旨만 가진 상태로 조상, 왕자, 혹은 상극살, 귀신 들림 등을 처리할 권한은 지녔던 반면, 인간 세상의 일을 판단하는 천지天旨는 없었다. 즉, 범인들의 운세, 운도, 사업, 감정, 수행 등에 개입할 권한이 아직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신성은 점점 강해졌다. 오부천세 다섯 신의 강림을 감지한다거나, 마더우 지역의 천상성모天上聖母를 집으로 초대해 주요 가신家神으로 삼게 되었다. 성모의 강림은 아버지의 인생을 온전하게 만들어 젊은 유하이가 천지를 받도록 도왔다.
천지를 받은 이후로 유하이의 신격은 완벽해졌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뭇 신들은 반드시 성황신을 통해 지시를 내렸다. 아버지는 신 앞에서 완강하게 벼텼지만, 유하이는 아버지에게 세상을 구하러 왔다며 ‘자네의 몸을 빌려주면 천문지리학을 가르쳐주겠노라’고 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점점 받아들였고 결국은 자원해서 신 대신 인간 세상에서 행하는 사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어 말할 때면 음색은 여전히 그였지만 말투에 어떤 어조가 가미되어 옛날 가락처럼 들렸다.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고 단어마다 끝을 미세하게 늘어뜨려서 평소의 남부 억양은 자취를 감추고 고대 민난어를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신이 아닌 아버지 그리고 성과 속이 만날 때

저자는 원래 아버지에 관한 책을 낼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버지에 관해 기록하는 순간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최소 20년 이상 한여름의 울창한 숲속 유일한 별을 느껴왔다. 우리 아버지 말이다”라면서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글을 통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또 자신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독실한 아버지는 신의 후광을 벗으면 보통 사람들처럼 분주하고 고민 많은 존재가 되었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그는 평생 신뢰와 배신 사이를 돌고 돌았다. 마음이 몹시 약했고, 신에 빙의될 수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늘 측은지심이 일어 남들을 도왔다. 이런 성정을 감지한 사람들은 이를 볼모 삼아 돈을 빌려달라면서 찾아왔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기꺼이 돈을 내주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그것이 그에게 멍에가 되어 돌아올 줄은 알지 못한 채. 어느 날 사정이 좋지 않아 돈 부탁을 한번 거절했더니 인터넷에는 이런 글이 나돌았다. ‘내가 못 나갈 때는 냉담하고 잘나갈 때만 다정하다.’ ‘친척 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지 않는가.’ 선의는 대개 상처로 되갚아졌고 아버지는 늘 후회를 반복했다.
저자는 자신이 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아버지가 빙의되어 몇 시간 동안 신이 된다는 것은 믿는다. 그가 했던 모든 말을 사실로 믿는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상처, 선함, 좌절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운명의 고리를 한 번씩 자르는 느낌이었다. 계속 잘라나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굳건한 장벽이 되어야 했다.”
어떤 경험의 깊이와 고통은 영원히 묘사해낼 수 없지만, 시간과 문자 사이의 틈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아버지와 자신 앞에 더 나은 삶이 기다리리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신은 있는가? 이 질문에 관해 나는 항상 의문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물론 나는 신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신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신은 대부분 없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 항상 귀신(신)이 있다고 느꼈고, 이런 공포가 온몸 구석구석에 스미다가 산산이 흩어지곤 했다. 공포가 남기고 간 흔적과 무력한 감정을 숨기고 싶었지만 불가능했고, 그리하여 그 감정들은 이 책에서 활자화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고통의 기록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글이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라고 말한다. 글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노래를 합주하며 서로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소개

지은이 │ 린처리林徹俐
타이완 남쪽 타이난 지방의 작은 마을 완리灣裡에서 태어났다. 둥하이대학에서 중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중정대학 중문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푸청府城문학상, 쯔징紫荊 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9년부터 밴드 오월천五月天의 열렬한 팬이다.

옮긴이 │ 이기원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멜버른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투자증권 해외투자영업부와 한국거래소 베이징 대표처에서 일했다. 현재 멜버른에 거주하며 중국어권 도서를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인생의 격차』가 있다.

목차소개

추천사: 신의 자녀들이 글을 쓰는 중입니다_장야니蔣亞妮

빙의 전: 믿음

1장 빙의에 들어가며: 아버지이자 신
아버지 신
소년 아버지의 기묘한 표류
신의 몸
뭇 신에게 묻사오니
혈연에 의지할 수 없는 운명
선남선녀
다리를 건너
귀여운 말
부적을 태우다

2장 일상: 신이 없는 곳
계근대
놀이공원
빛이 있는 곳
아직 무너지지 않은 장소
바다가 보이는 비밀 경로
소공원
바람이 불어오면

3장 빙의에서 물러나며: 신 이외의 이야기
아버지의 도시
잠 못 드는 사람들
The F
나는 유머로 위로할 줄 모른다
경계를 넘어
철새
믿음 그 후: 영원의 영원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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