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책임질 청소년 세대, 나아가 부모 세대를 위한
가장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세계문학 축역본의 정본 컬렉션
<생각하는 힘: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제39권 『사냥꾼의 수기』
투르게네프(1818-1883)는 『사냥꾼의 수기』의 첫 편인 「호리와 칼리니치」를 그가 29세 때인 1837년에 발표한다. 그는 그 작품을 통해, 자신조차도 그런 편견의 노예였음을 솔직히 밝힌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그런 편견의 노예였으니 보통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호리와 칼리니치」를 쓰고 발표했는지도 모른다. 『사냥꾼의 수기』 연작은 그런 고백으로 시작한 작가가, 그런 편견을 벗고 객관적으로 농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비참한 생활 모습과 순박함, 삶의 지혜들을 인간미 넘치게, 또한 서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집이다.
19세기 중엽 러시아 인구는 약 6,700만 명이었다. 그중 귀족과 일부 자유농민을 제외한 4,000만 명이 농노였으니, 국가 전체가 농노들을 기반으로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런 제도를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겼다. 농노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리와 칼리니치」를 발표한 것만으로도 투르게네프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저 무지몽매하고 더러우며,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짐승에 가깝다고 여겨졌던 농민들(더 정확히 말한다면 농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지혜와 재능이 있으며, 섬세한 감수성, 순박한 정신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호리와 칼리니치」의 호리와 칼리니치는 둘 다 똑같은 농노이다. 그런데 둘은 무척 다르다. 뛰어난 현실 감각과 지혜를 지니고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호리와,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거기서 큰 만족을 느끼고 사는 온화하고 겸손한 칼리니치. 그들을 ‘농노’라는 단어로 묶어 똑같이 취급하기는 어렵다. 또 그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귀족 지주보다 조금도 모자란 인간이 아니며, 그 순박함과 성실함, 진실함에서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카시얀」의 카시얀은 종교심이 충만한 자연 철학자의 모습으로 화자를 놀라게 한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화자는 ‘그의 말투는 전혀 농부의 말투가 아니었다. (…) 그의 말은 사려가 깊었으며 신중했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나는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또한 「비류크」의 산지 관리인은 주어진 임무에 더없이 충실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약한 자를 향한 동정심을 지닌 감동적인 인물이다. 또한 「죽음」에서는 죽음 앞에서 초연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경탄하게 한다.
『사냥꾼의 수기』는 농노해방이 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불가피한 것인지 역설하지도 않고, 농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착취를 당하고 있는지 격렬하게 고발하지도 않는다. 농노제도를 대놓고 비난하지도 않으며 농노들의 분노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서정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감싼다. 상류계급보다는 농부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진 투르게네프는 농부들 안에 숨어 있는 인간성, 상상력, 시적이고 예술적인 재능, 기품과 총명함을 화자의 다양한 만남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사냥꾼의 수기』는 은근하고 눈에 거슬리지 않는 방법으로 농노제도의 부당함과 모순을 제기한다. 러시아 국민들의 농노제 폐지에 대한 염원과 더불어 이 작품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를 폐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