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곳적 원시 때부터 내면 깊이 잠재워진
야성적 본능과 욕구의 부름에 귀 기울여보자.
『야성의 부름』은 인간사회 안에서 인간과 함께 지내던 벅이라는 개가 인간의 숨결, 문명과 결별하고 야성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작품의 주인공 벅은 개다. 그러나 그는 문명적인 삶으로부터 자연적인 야성의 삶으로 돌아간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자연적인 야성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능에 충실한 삶, 본능이 이끄는 삶을 산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야성의 부름에 응한다는 것은 본성, 본능에 응한다는 뜻도 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성,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산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이룩한 문화와 문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뜻에서만이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본성이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른 동물들, 특히 하등 동물일수록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산다. 본성에 충실하기만 해도 하나의 종으로서 생존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문명과 자연, 문화와 본성의 구분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인간 자체가 문화화된 동물이고 인간의 모든 표현 자체가 이미 문화이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할수록, 문화가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인간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인간의 깊은 욕망이 충족되는 기쁨은 줄어드는 것 같다. 분명히 세련된 문명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왠지 따분하고 왠지 점점 더 억압이 심해지는 것 같고, 왠지 왜소해지는 것 같고, 왠지 거짓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고, 왠지 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야성의 부름』이 초판 1만 부가 하루 만에 매진되는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런 아쉬움에 간접적인 충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야성의 부름』이라는 소설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소설의 주인공 벅의 부름에 응한 사람들은 저 태곳적 원시의 삶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기 속에서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영웅적인 욕망, 모든 사람들 위에 우뚝 서서 그 모두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 하지만 한 번도 실현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실현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비릿한 욕망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 꿈은 초인을 향한 꿈이기에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로 그 실현 불가능성 때문에 그 꿈은 거의 모든 인간들 내부에서 더욱 강하게 본능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벅이 창백한 달빛 아래, 늑대 무리의 선두에 서서 달리는 모습을, 늑대처럼 원시의 노래를 울부짖는 소리에 응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