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엄마의 죽음, 연인의 배신,
산더미 같은 빚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소설……
그래도 슬픔 속에 다시 몸을 일으켜
쓰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일상 속 강렬한 내적 위기를 겪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위트 넘치는 목소리로 그려내며 감동을 선사하는 작가 릴리 킹의 『작가와 연인들』(2020)이 출간되었다. 국내에 소개되는 릴리 킹의 첫 작품인 『작가와 연인들』은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 케이시가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글을 쓰면서 큰 상실을 딛고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유명 소설가, 시인, 작가 지망생, 서점 직원 등 책과 가까운 곳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와 풍부한 문학 레퍼런스가 읽는 재미를 더하는 이 작품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뉴잉글랜드소사이어티북어워드를 수상했다.
스페인과 미국에서 영어 교사와 레스토랑 종업원, 서점 직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고 팔 년 만에 첫 장편소설을 출간한 릴리 킹의 이력은 케이시의 삶과 닮아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작품이 “페이지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한 인물과 신선한 이야기”라는 평을 받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때로는 글쓰기가 생활을 위협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쓰지 않으면 모든 게 더욱 형편없이 느껴져서” 차마 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절박한 마음을, 릴리 킹은 놀랍도록 생생하고 적확하게 그려낸다. 또한 작가는 감각적인 묘사로 세 남녀의 복잡한 관계를 이야기한다. 연애가 “언제나 불꽃놀이를 하는 것과 침대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사이의 선택”이라면 우리의 삶 역시 꿈과 생활, 평온함과 떨림, 슬픔과 욕망이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맞물리는 다각관계 속에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작품은 섬세하고 지적인 시선으로 포착한다.
글쓰기도 사랑도 위기를 맞은 나날들,
어느 젊은 여성 예술가의 초상
1997년 매사추세츠, 주인공인 케이시 피보디는 정원 헛간으로 쓰던 작은 방에서 썩은 잎의 냄새를 맡으며 눈을 뜬다. 아침이면 방세를 깎기 위해 재수없는 집주인의 개를 산책시켜야 하고, 잠깐 글을 쓰다가 하버드스퀘어에 있는 레스토랑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 한다. 가는 길에 기러기들을 만나면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한다. 학자금 대출로 진 어마어마한 빚, 여전히 소화하지 못한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연인의 배신과 육 년 동안 완성하지 못한 소설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진실을 안고도 케이시는 애피타이저와 앙트레, “크랜베리 코냑 글레이즈” 같은 말들을 능숙하게 읊으며 해야 할 일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런 케이시의 삶에 끼어든 두 남자가 있다. 오스카는 케이시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유명한 작가로, 암으로 아내를 잃고 두 아이를 홀로 키운다. 오스카가 진행하는 워크숍의 참여자이자 작가 지망생인 사일러스는 속을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성적 자극을 주는 젊은 남자로, 몇 년 전 사고로 여동생을 잃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으로 이어진 세 사람은 서로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며 관계를 지속한다. 아내의 빈자리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오스카의 가정에서 그의 두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케이시는 정서적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사일러스와 그의 볼품없는 자취방에 누워 있으면 그에게 뼈가 녹을 것 같은 끌림을 느낀다. “뜨거움과 차가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거나 말하지 못하는 남자들” 사이를 오가며 케이시는 혼란을 겪는다.
길을 잃은 슬픔 속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꿈을 꾸고, 사랑하고, 살아간다는 것
누구에게나 젊은 날이라는 건 불안정한 요소들로 가득하며, 방향키는 마구 흔들리지만 어쨌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음에 위로를 받아야만 견딜 수 있는 레이스 같은 것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작가를 꿈꾼다는 것은 때론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로 스스로를 돌보면서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걷는 것이라고 작품은 이야기한다. 동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떤 날은 과거에 했던 모든 작업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잔인한 꿈이라고. 케이시가 온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따라가다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작가를 꿈꾼다는 건 매일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케이시가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기 힘들어 절망할 때,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빚은 하나도 줄지 않았지만 레스토랑의 격무는 못 견딜 지경일 때, 몸은 여기저기 자꾸 고장나는 것 같을 때, 그녀가 돌아갈 곳이라고 느끼는 유일한 집은 글쓰기다. 소설을 쓰는 일. 사랑하는 일이 있고 지켜야 할 꿈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끝끝내 그녀를 다시 일어나게 한다. 소설을 쓰는 시간은 케이시로 하여금 “심지어 가끔 내가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
케이시의 숨가쁜 삶에 위로가 되어준 기러기들의 존재처럼, 『작가와 연인들』은 어떤 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이미지 없이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깊은 위로가 되어주는 작품이다. 인간적인 실수를 거듭하지만 끝끝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는 인물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을 응원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생동감 넘치는 문장과 섬세한 감정 묘사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케이시와 걸음을 맞추도록 만든다. 레스토랑에서 열심히 플레이트를 옮기고 있는 케이시, 좁은 방에서 글을 쓰는 케이시, 자전거를 타는 케이시,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케이시. 우리는 왜 슬퍼하고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저 함께 희망을 믿어본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혼란과 슬픔을 지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 따스한 온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