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_ 로마 역사는 살아 있다
서문_ ‘도전과 응전의 제국’ 로마, 2206년 흥망성쇠의 비밀
part I
‘회복탄력성’과 ‘공공성’, 두 기둥으로 세계 제국이 된 로마
― 최대 경쟁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통일하다
① Republican Government(공화정)
독재를 혐오한 로마인, 공화정을 선택하다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비니족 여성 대량 납치 사건’을 명령했다? | 로마 공화정 탄생의 기폭제가 된 ‘루크레티아 능욕 사건’ | 로마는 왜 그토록 독재를 경계했을까? | 고대 로마의 민주정(공화정)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보다 1년 앞섰다고? | 500년 지속된 로마 공화정 vs. 50년 지속된 아테네 민주정 | 플라톤은 독재정,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을 지지한 까닭은? | 고대 그리스가 로마처럼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② Resilience(회복탄력성)
패배할수록 강해지는 로마군, 패배에서 배우는 로마인
‘로마 제2의 건국자’ 카밀루스는 어쩌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도 추방되다시피 했을까? | 카우디움 전투에서 삼니움족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아주고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로마군 | 막강한 로마군에게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안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 패전 장수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는 관용과 융통성이 로마를 대제국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 ‘한니발 전법’을 응용해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를 꺾은 명장 스키피오 | 스키피오는 왜 자신의 묘비에 “은혜를 모르는 조국이여, 너희는 내 뼈를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글을 남겼나? | 관용의 로마가 카르타고에만은 관용을 베풀지 않고 초토화한 이유 | 보수파 원로원 의원 카토는 왜 스키피오를 그토록 끔찍이 싫어했을까?
③ Publicness(공공성)
로마인의 철두철미한 ‘공공성’이 제국으로 도약하는 디딤대였다?
고대 로마를 단순한 공화정이 아닌 ‘공화정 파시즘’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 | 인류 역사상 ‘공적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민족, 로마인 | 로마인은 어떻게 그토록 강한 ‘공공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 신앙심이 깊었던 로마인이 현세의 가호를 빌지 않은 까닭 | 고대 로마 명장 투베르투스는 왜 규율을 위반한 친아들의 목을 베었나? | 연대 책임에 기초한 형벌인 ‘10분의 1형’ 데키마티오를 엄격히 시행한 로마군
part Ⅱ
최고 영웅 카이사르와 최고 황제 아우구스투스,
로마를 반석 위에 세우다
―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의 성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④ Confrontation&Competition(대립과 경쟁)
‘대립’하며 혼란을 겪고, ‘경쟁’하며 발전하는 로마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 승리한 뒤 ‘승자의 저주’에 빠진 로마 | 명문 귀족 가문 출신 그라쿠스 형제가 가난한 평민을 위한 개혁에 나선 이유 |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곡물법 개혁안을 반대하던 원로원 의원은 왜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섰나? |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립한 ‘평민파’와 ‘벌족파’ | 스파르타쿠스 난 진압으로 명성을 얻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어쩌다 앙숙이 되었을까? | 독재자 술라의 압박에도 카이사르가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지 않은 까닭은? | 폼페이우스 vs. 카이사르 내전에서 카이사르가 최종 승자가 되게 한 결정적 무게추는 그의 ‘관대함’이었다?
⑤ Heros&Emperors(영웅과 황제)
로마를 반석 위에 세운 최고의 영웅과 황제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라는 사적 관계는 공화정 말기 로마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 군대가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뀌면서 병사의 충성 대상이 ‘국가’가 아닌 ‘장군’으로 바뀐 것이 로마 멸망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었다? | 의원 정수를 늘리는 교묘한 방법으로 원로원을 장악한 정치 천재 카이사르 | 수많은 반대파와 정적에게 보여준 무한 관용이 부메랑이 되어 그의 심장에 꽂히다 | 안토니우스는 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대중 앞에서 공개했을까?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시대에 최고 신관이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보다 높은 직위였다고? |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왜 권력과 무관한 ‘최고 신관’ 지위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⑥ Succession Structure(후계 구도)
로마 제국의 ‘성쇠’를 좌우했던 후계 구도 문제
카이사르는 왜 병약하고 군사 재능도 뛰어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점 찍었을까? |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과 민회가 부여한 온갖 특권을 정중히 사양한 까닭 | 아우구스투스는 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도 않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을까? | 유능한 황제 티베리우스는 어쩌다 로마 시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나? | 유혈이 낭자한 검투사의 경기에 로마인이 열광한 이유는? | 중병을 앓은 후 폭군으로 변한 ‘미치광이 황제’ 칼리굴라 |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비운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 친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잔인하게 살해한 희대의 폭군 네로 | 네로가 기독교 신자를 박해했다는 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part Ⅲ
가장 행복했던 ‘5현제 시대’ 이후 찾아온
최악의 ‘군인황제 시대’
―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 번영의 끝에서 몰락이 시작되다
⑦ Good Politics&Bad Politics(선정과 악정)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의 선정과 도미티아누스의 악정, 그 놀라운 결과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최고 지휘권에 관한 법령’으로 혼란을 잠재우다 | 재정 회복을 위해 소변에도 세금을 부과한 ‘현명한 짠돌이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 형 티투스의 선정 vs. 아우 도미티아누스의 악정 | ‘공화정 부활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세 명의 폭군, 칼리굴라・네로・도미티아누스
⑧ The Age of Five Good Emperors(5현제 시대)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현군들의 시대
네르바 황제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한 ‘후계자 선택’이 로마의 5현제 시대를 열어준 역사의 아이러니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 ‘로마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열다 |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의 자녀를 위한 장학금 조성 정책인 ‘알리멘타’를 시행해 민중의 삶을 개선한 현군 트라야누스 | 트라야누스, 연이은 원정 승리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로마 제국을 이룩하다 | 하드리아누스는 과연 전임 황제 트라야누스의 지명이 아닌 황후 플로티나의 계략으로 제위에 올랐을까? | 하드리아누스, 제위에 오른 후 자신에게 쏟아진 불신과 혼란을 탁월한 정책과 업적으로 잠재우다 | 치세 기간의 절반을 속주 시찰에 할애하면서도 ‘하드리아누스 르네상스’를 이루고 대제국의 내실을 다진 또 한 명의 현군 | 유대 반란에 후계자 사망, 건강 악화까지 불운으로 점철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만년 | 내정과 외정을 두루 안정시켜 5현제 중 가장 뛰어난 황제로 평가받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역사상 최초로 ‘공동 통치 체제’를 구축하다 | 아우렐리우스가 플라톤의 이상에 부합하는 황제인 까닭
⑨ The Beginning of Chaos(혼돈의 시작)
막장 황제들이 활개 치고 제위를 사고팔던 참담한 시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기록된 코모두스, 돈으로 평화를 사고 기행을 일삼다 | 근위대에게 돈을 주고 제위를 샀으나 66일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어리석은 황제 디디우스 | 로마를 ‘로마인의 제국’에서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북아프리카 출신 황제 세베루스 | 공동 통치자인 친동생 게타를 암살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한 폭군 카라칼라 | 여장과 동성애 등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광인 폭군 황제’ 엘라가발루스
part IV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 로마 멸망
― 관용을 상실한 로마, 멸망의 길로 질주하다
⑩ The Military Emperors’ Time(군인황제 시대)
최고의 세계 제국 로마를 멸망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들
로마 제국 멸망을 ‘쇠퇴・멸망 시대’가 아닌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변혁 시대‘로 보아야 한다? | 로마 제국 황제의 출신지가 이탈리아반도가 아닌 발칸반도에 집중된 까닭 | 로마 제국을 멸망의 길로 몰고 간 군인황제 시대를 열어젖힌 최악의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 | 고트족 침공을 막기 위해 군대의 전권을 맡긴 데키우스에 의해 제위를 잃은 아랍 출신 황제 필리푸스 | 내정 질서를 수립하고 민심을 바로잡은 ‘명군’ 데키우스가 ‘폭군’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기독교 박해’ 때문이었다? | 로마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의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죽은 황제 발레리아누스 |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삼국시대(로마 제국・팔미라 왕국・갈리아 제국)’가 형성된 적이 있다고? | 팔미라 왕국・갈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한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 로마 제국의 고질병이 되어 50년간 이어진 ‘황제 암살 사건’ |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한 군인황제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개혁을 완성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⑪ The Monotheistic World Empire(유일신교 세계 제국)
유일신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어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불러일으켰나?
위대한 개혁 군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범죄의 창조자’로 폄하된 이유는 ‘기독교 박해’ 때문이었다? |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의 옛 신앙’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권력과 권위를 황제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고? | 77명의 정식 로마 황제 중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유일무이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 공동 황제 시대의 혼란에 마침표를 찍고 로마를 재통일하며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 콘스탄티누스, 순도 99.8퍼센트 금화 ‘솔리두스’를 무기로 화폐 개혁에 성공하며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다 | 임종 직전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콘스탄티누스가 다른 황제들과 함께 로마의 ‘신’이 된 아이러니 |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기독교 신자 수가 3~4세기 군인황제 시대에 급증한 이유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 율리아누스 황제가 30대 초반에 죽지 않고 20년만 더 살았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황제들이 그토록 열심히 기독교 보호 정책을 펼친 뜻밖의 이유는? | ‘관용 상실’이 로마 제국 멸망의 첫 번째 원인이라고? | 유능한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유일하게 무릎 꿇린 인물,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⑫ The Fall of the Roman Empire(로마 제국 멸망)
‘관용’을 잃어버린 로마, 자기 심장에 비수를 꽂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영원히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진 로마 제국 |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이름이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와 같은 얄궂은 운명과 역사의 아이러니 | 20년에 걸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토 확장 정책이 오히려 동로마 제국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데? | ‘세 개의 세계’가 로마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던 고대 지중해 세계가 중세에 다시 ‘세 개의 세계’로 분열하며 새 시대를 열다 | 지금까지 나온 로마 제국 멸망 원인이 210가지에 달한다고? | 노예가 노예를 낳아 새로운 노예를 충당할 수 없었던 시대의 로마는 어떻게 400년간이나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나? | 로마의 ‘공공 의식’ 상실이 인프라 노후화로 이어졌고, 멸망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 로마 제국의 ‘황제 권력 상실’이 역설적으로 권력을 회복한 듯 보였던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까닭 | 서로마 제국 멸망은 어느 날 갑자기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로 밀고 들어오며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과 제정 시대의 로마인이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유는? | 3세기 로마 제국 내 기독교 신자 수가 급증한 또 하나의 원인, ‘스토아 철학’ 확산 | 관용이 사라진 로마 제국 말기 상황과 닮은꼴인 현대 사회가 나아갈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