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순간들을 엮어
젠더화된 민족주의의 계보를 해부한 독창적 몽타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는 한국 사회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회자되어온 레토릭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가? 이는 곧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최근 불거진 '국가 정통성' 논란은 이 질문에 대한 익숙한 변주일 터. 반일 대 친일, 진보 대 보수와 같은 통상적 관점에 일말의 의구심을 품었던 이라면, 실라 미요시 야거가 펼쳐 보이는 애국의 계보도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야거는 개화기부터 현대까지의 특정 텍스트를 골라낸 뒤 그것이 어떤 서사로 구축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새롭게 한국 근현대사의 내적 논리를 읽어낸다. 그녀는 이 작업을 위한 방법론으로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채택한다. “수수께끼 같은 형식을 활용하여 충격을 주고 이를 통해 생각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림 퍼즐”이라 할 수 있는 몽타주처럼, 여러 텍스트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병치함으로써 그들 간의 연관성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작은 개별적 순간의 분석 속에서 전체 사건의 결정체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통 역사학과는 사뭇 다른 방법론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강렬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야거는 흔히 적대적 이분법으로 나뉘었던 관점들의 내적 논리가 기실 얼마나 유사한지를 섬세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젠더'라는 필터로 한국사를 바라볼 때 새로이 조명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가령 대표적인 항일 인사 중 한 사람인 신채호가 바라 마지않으며 구축하려 했던 것은 한껏 '무력'을 갖춘 국가였으며 그가 되살리려 했던 전통은 영웅들이 강하게 칼을 들던 과거였다. 일제강점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겠지만, 야거는 이순신을 강력하게 내세운 박정희가 바로 신채호의 계승자임을 넌지시 지적한 뒤 그의 서사를 되짚어본다. 사상적으로는 대척된 듯 보이지만 이들의 서사가 닮은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은 여성 또한 빗겨가지 않는다. 야거는 이광수의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열녀'와 '효녀'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애국부인'으로 창조적으로 대체되었음을 논증한다. 과거와 견주어보면 마음을 바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신여성조차 다시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곤 했던 것이다. 저자의 시선은 1980년대의 운동권,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그리고 김대중에게까지 가닿으면서, 대한민국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주창하며 만들어낸 서사의 논리들을 하나하나 파헤친다.
이 독특한 저작은 야거가 샤머니즘을 연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6월항쟁을 목도한 뒤 자신의 연구 방향을 틀면서 태동되었다. '외부자'이자 '연구자'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바라볼 때 불거져 나온 질문들을 해명할 기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녀는 이 저작을 기점으로 인류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한국 전문가로 자리매김한다. 한국에서는 야거가 젊은 시절 버락 오바마의 연인이었던 점이 기사화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한국사에 대한 명민한 통찰력을 선보이는 저자로서 다시금 그녀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