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거듭 밀려나 점점 사라져가는 자의 실존
카프카 문학의 정수가 담긴 첫 장편소설
“이 책의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영원히 소속감이라는 바위를 헛되이 굴리는 현대의 시시포스다.” _알베르 카뮈
『소송』 『성』과 더불어 ‘고독’ 삼부작으로 불리는 『실종자』는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로, 미완성작으로 남았으나 카프카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브로트가 1927년부터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펴냈으나, 1983년 독일에서 발간된 비평판 이후 카프카가 일기에 쓴 원제대로 ‘실종자’로 바뀌었다. 잘못을 저질러 고향에서 쫓겨나 뉴욕에 오게 된 한 청년이 고도의 기술문명과 자본주의 체제인 미국 사회에서 겪는 소외와 상실, 고독의 문제를 첨예하게 짚어낸다. 이 소설의 첫 장 「화부」는 카프카 생전 1913년 단행본으로 발표되어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폰타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카프카 문학의 정수가 담긴 첫 장편소설
『소송』 『성』과 더불어 ‘고독’ 삼부작으로 불리는 『실종자』는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로, 다른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 미완성작으로 남았으나 카프카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친구이자 유고를 편집해 소개한 막스 브로트가 1927년부터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펴냈으나, 1983년 독일에서 카프카 육필 원고에 기초해 발간된 비평판 이후 카프카가 일기에 쓴 원제대로 ‘실종자’로 바뀌었다. 이 소설의 첫 장 「화부」는 카프카 생전 1913년 단행본으로 발표되어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15년 폰타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1911년 말에 쓴 초고 200매가량을 폐기하고 싶다고 밝힌 후 본격적으로 이 소설 집필에 매달린 건 1912년 가을부터 1914년 가을까지다. 그사이 첫 단편 「선고」와 대표작 중 하나인 「변신」을 썼으며, 끝 무렵에는 『소송』 집필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이 책의 1장 「화부」와 「선고」 「변신」을 함께 엮어 ‘아들들Die Söhne’이라는 제목으로 펴내자는 제안을 출판인 쿠르트 볼프에게 하기도 했다. 세 편 모두를 관통하는 카프카 문학의 핵심 테마(아버지 권력과 길항하는 아들의 서사이자 관계로부터의 고립)를 첫 장편 『실종자』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바, 그가 몇 번이나 좌절과 중단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구현해내고자 한 문학세계의 맹아가 담겨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청년은 아메리카 여정 내내 “거의 모든 곳에서 그의 존재가 실패”(크라카우어)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는 만큼 “희망은 금지되는 게 아니라 금지되지 않기에, 희망에 가장 처절하게 고통을 가하는 작품”(모리스 블랑쇼)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사회에서 표류하는 ‘현대의 시시포스’
점점 관계로부터 밀쳐져 사라져가는 자의 실존
이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카프카의 작품들 중에서도 아주 정교한 서사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제목이 붙은 6장, 제목이 없는 2장, 그리고 미완성 장들(3장)로 구성된 이 소설의 첫 장면부터 주목을 요한다. 즉 뉴욕으로 입항하는 배에서 점점 짐꾼들에 의해 ‘난간까지 밀쳐진’ 그의 시선에 처음 들어온 것은, 우뚝 솟아난 팔로 횃불이 아닌 ‘칼을 든 자유의 여신상’이다. 자유와 정의, 희망과 꿈의 신세계로 진입하고 정착하기 위한 도정은 과연 어떻게 될까? 이곳에서 과연 카를은 새 출발을 하고 성장할 수 있을까?
‘카프카적인 시작’을 알리는 이 첫 장면에서 보다시피, 17세의 카를 로스만은 고향 프라하에서 하녀를 임신시킨 문제로 부모가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막 뉴욕항에 입성하면서 앞으로의 어두운 아메리카 여정을 노정한다. 거기서 그는 기계화된 문명과 테일러주의로 돌아가는 미국 사회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상류사회에서부터 자본주의 밑바닥에 있는 계급까지 두루 만나고 겪는다. 배에서 처음 만난 해고 위기라는 억울한 상황에 처한 화부를 돕는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서, 원칙과 효율을 추구하며 미국 사회에서 정재계 고위직 인사로 성공한 외삼촌이 이끄는 기업사회의 경영후계자 자리, 삼촌의 눈 밖에 난 한 번의 실수로 얼토당토않게 내처져 어느 호텔에서 겨우 운좋게 얻어낸 엘리베이터 보이로서의 최말단직, 부랑하는 실업자이자 이민자 무리(로빈슨과 들라마르슈)와 함께 성매매로 자본을 축적한 가수 브루넬다의 하인을 거쳐, “누구든 환영한다”는 오클라하마 야외극장의 기능직 채용시험에 ‘니그로’라는 이름으로 응하여 알 수 없는 기차에 오르며 끝내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자’로까지, 그의 존재는 여러 변곡점을 거칠수록 차츰 희박해진다. 선실, 별장, 호텔, 극장 채용시험장(경마장)이라는 주요한 서사 공간에서 이뤄지는, 카프카의 특징인 법정 재판을 방불케 하는 ‘심문’ 장면들은 아메리카 사회로의 진입과 정착, 관계와 소속에 대한 카를의 욕망이 철저히, 첩첩으로 적나라한 실패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서사적 긴장과 멜랑콜리를 더한다. 횡단면상으로는 유럽의 고향에서 미국 내 이방 세계로의 추방을, 종단면상으로는 다양한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만나며 번번이 희망 없는 추락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행 배, 외삼촌의 집과 사무실, 그린 씨의 별장 속 미로 같은 공간, 옥시덴털호텔의 주방과 엘리베이터, 브루넬다의 방으로 점점 옥죄듯 폐쇄되어가는 닫힌 구조에서 갑자기 마지막에는 극장의 채용시험장인 경마장에서 오클라하마행 기차로 넘어가 아득히 열린 공간 구조로 넘어간다. 마지막 장면은 곧 현대인의 불가해한 삶의 터전에 대한 확장된 우화로도 읽힌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마지막 부분을 유토피아적 여정으로 끝맺음하려 했다고 오독했으나, 1915년 9월 30일자 카프카의 일기는 정반대로 구상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로스만과 K, 죄 없는 자와 죄 있는 자, 결국 둘 다 똑같이 처벌되어 죽임을 당한다. 죄 없는 자는 보다 손쉽게, 때려눕혀지기보다는 옆으로 밀쳐지는 식으로.”
카프카는 미국 땅에 한 번도 발을 붙인 적이 없으나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현대적인” 아메리카를 보여주고자 했다. 당시의 여행 책자나 보고서, 사진이나 종종 접했던 영화 등 2차 문헌을 참고하며 대도시의 마천루, 파업과 교통 혼잡, 선거 캠페인 및 사무실 노동 현장, 기계화된 통신 및 운송시설 등을 당대의 유럽인의 시각에서 비교해보고 연구해나가면서 자기만의 형상화에 골몰했다. 발전과 성장에 목매던 현대의 최첨단, 아메리칸드림과 신세계에 대한 그 허상을 깨부수고 있는 『실종자』는, 그로테스크하고도 몽환적인 색채가 가미된 서술로 부조리한 현실과 권력구조의 폭력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카프카는 이 작품으로 “영원히 소속감이라는 바위를 헛되이 굴리는 현대의 시시포스”(카뮈)를 창조해냈다.
해석의 여러 단서를 제공하는 해제와 원전에 충실한 번역
2024년 6월 3일은 카프카 타계 100주기다. 카프카는 서구 문명의 몰락이자 인간 정신의 붕괴를 목도하게 한 제일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미국 사회를 모델로 이 작품을 썼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이 뒤섞인 현대의 최첨단 도시에서 그 전모는 알 수 없이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위로부터 아래로”(카프카) 겹겹이 위계화된 권력과 자본시장에 종속되어 기계 부품처럼 소외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실존에 대한 카프카식의 문제 제기는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이민자이자 표류자로서 한 젊은이가 어떻게 관계로부터 얼토당토않게 거듭 밀쳐져 점점 소속의 고리를 잃고 행방이 묘연한 실종자로 전락해갈 수밖에 없는지, 불가해하고도 부당한 폭력과 계속 마주하면서 어째서 말미에 희망 없는 사지로, 끝이 나지 않을 무의 세계로 사라져가고 마는지, 그 종적을 아주 정치하게 묘파해낸다.
이 책을 옮긴 이재황 번역가는 새로 정립된 비평판을 기준으로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의 원형을 비추어 짐작해볼 수 있도록 충실히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옮긴이 해설에 남겨놓았다. 이를테면 브로트 판과 달리 카프카가 오클라호마를 ‘오클라하마’로 일부러 표기한 것에서도, 주인공 카를 로스만의 이름이 갖는 상징성(‘말’을 뜻하는 ‘로스Roß’와 ‘남자, 사람’을 뜻하는 ‘만Mann’의 결합이 보여주는 반인반마 켄타우로스와의 비교)에서도 이 작품을 새롭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옮긴이는 카프카 문학의 핵심을 ‘부정성의 미학’으로 짚어내면서 이 작품을 두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서구 문명의 진보적 역사관과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20세기의 패러다임에 대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고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