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말기 잔당의 오대 나라의 역사를 쓴 역사소설로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쓴 소설의 한글번역과 한문이 동시 기재 예시문 가지부족 부부지이율운 노래로는 부족하니 다시 부로써 율을 맞추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唐虞三代皆崇德 降自春秋治不隆. 당우삼대개숭덕 강자춘추치불륭 당나라와 우나라의 요순과 3대에는 모두 덕을 숭상하나 춘추시대부터 융성하지 않았다. 擾擾 ?? [r?or?o] 1) 복잡하고 어지러운 모양 2) 소란한 모양 兵戈無義戰 紛紛謀利詐相攻。 요요병과무의전 분분모리사상공 어지러운 병기로 의로운 전쟁은 없고 어지럽게 이익을 도모하면 속여 서로 공격한다. 漢祛秦暴眞天命 唐統華夷雜?功。 한거진포진천명 당통화이잡패공 한나라는 진나라의 포악함을 제거하며 진짜 천명이니 당나라는 중화와 사이를 통일하여 패업의 공로를 섞었다. 禍亂若無安祿兆 黃巢 黃巢 미상 ~ 884 당 희종(僖宗) 때의 반란군 지도자. 875년 수천 명의 추종자들을 모아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며 879년 광저우(?州)를 점령하고 이후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881년 수도 장안(?安)을 점령하였다. 이후 스스로 대제(大?)의 황제라고 칭했으나 883년 당은 돌궐계 유목 부족인 사타(沙陀)의 도움을 받아 그를 장안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나 10년간의 반란으로 당의 지배력은 파괴되었으며 당은 급격하게 쇠퇴하여 황소의 부하 장군이었던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멸망하였다. 중국시사문화사전 焉敢亂僖宗 僖宗 862 ~ 888 당(唐)의 제18대 황제(재위 873~888). 의종(懿宗)의 5자(子).873년 부친이 죽자 환관들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희종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고 이후 황제로서의 아무런 실권도 없이 유흥에 빠져 환관들이 정사를 전횡하였으며 지방의 절도사들이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75년에는 대규모 농민반란인 황소(黃巢)의 난이 발생하자 희종은 장안(?安)을 버리고 촉으로 도피하였으나 884년 반란군의 지도자 황소의 난이 잦아들어 885년에는 장안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후에도 정사는 환관 양복공(?復恭) 등이 장악하였고 황제는 허수아비로 왕조의 지배가 전국에 미치지 않게 되어 실질적으로 당(唐)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 화란약무안록조 황소언감란희종 재앙의 혼란이 만약 안록산의 조짐이 없었다면 황소가 어찌 감히 희종을 어렵게 했겠는가? 此後單道隋煬帝 양제의 이름은 양광(楊廣)·양영(楊英). 시호는 양제. 재위중 운하를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거대한 궁전들을 세웠다. 아버지인 문제(文帝) 양견(楊堅)과 황태자인 형 양용(楊勇)을 죽이고 604년 제위에 올랐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토목 및 정복 사업을 벌였다. 608년 남쪽의 쌀 산지와 북쪽의 베이징[北京] 지역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610년 이러한 수송체계를 더욱 확대했다. 이것은 후에 남쪽의 식량을 수도권과 북쪽 변방의 군대에 공급하는 데 이용된 대운하망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내륙 아시아로부터 중국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 장성을 수축했다. 더욱이 궁궐을 짓고 장식하는 데 국고를 낭비함으로써 위축되어가는 재정에 더욱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는 특별히 제작한 수레로 멀리 떨어진 숲에서 잘 자란 나무들을 실어다 정원을 꾸몄다. 후에는 몇 차례의 대외원정을 단행하여 제국의 영토를 남쪽으로는 지금의 베트남 북쪽으로는 내륙 아시아까지 확장했다. 그러나 612~614년 3차례에 걸쳐 벌인 대(對)고구려 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자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전국은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양제는 강도(江都 지금의 양저우[揚州])의 이궁(離宮)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수의 관료였던 이연(李淵)이 전국을 재통일하고 당(唐 618~907)을 세웠다. 開?河 ?河 중국의 황허강[黃河]과 화이허강[淮河]를 연결하는 운하(運河).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 개통하였다. 당시는 통제거(通濟渠) 또는 어하(御河)라 하였으며 당나라 때는 광제거(廣濟渠)라고도 불렀다. 뤄양[洛陽]과 카이펑[開封]의 중간 지점인 허인[河陰]에서 황허강으로부터 갈라져 남동쪽으로 향하면서 카이펑 ·상추[商邱] 등을 거쳐 쉬치[??]에 이르러 화이허강과 합류한다. 天下群雄?起 六十四處煙塵 煙塵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티끌이라는 뜻으로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일이나 분위기 反亂 十八處擅改年號。 차후단도수양제개변하 천하군웅병기 육십사처연진반란 십팔처천개연호 이 뒤로 단지 수나라 양제가 변하를 개통한뒤로 천하의 여러 영웅이 함께 일어나며 64곳에서 연기와 먼지를 일으키는 반란이 있고 18곳에서는 연호를 마음대로 고쳤다. 遼東李密、江南蕭銑、幽州劉隆眞、明州竇建德두건덕 창남(彰南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구청[故城] 북동쪽) 사람이다. 원래는 마을의 이장(里長)이었으나 611년 군에 들어가 부하 200명을 통솔하는 대장이 되었다. 후에 손안조(孫安祖)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돕다가 가족이 수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에 부하를 이끌고 고사달(高士達)에게 도망하여 수에 반기를 들었다. 고사달이 죽은 후 그 두목이 되어 무리 10만여 명을 이끌고 617년에 낙수(樂壽 지금의 허베이 성 셴 현[獻縣])에서 스스로 장락왕(長樂王)이라고 선포했으며 연호를 정축(丁丑)으로 정하고 백관(百官)을 설치했다. 이후 와강군(瓦崗軍)을 도와 수의 장군 설세웅(薛世雄)의 부하 3만여 명을 멸하여 세력을 크게 떨쳤고 양쯔 강[揚子江] 이북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618년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하 연호를 오봉(五鳳)이라 했으며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다음해에 도읍을 낙주(洛州 지금의 허베이 성 융녠[永年] 남동쪽)로 옮겼다. 농사와 양잠을 권장했으며 도적이 없어 상인이 오가는 데 편안했다고 한다. 621년 당(唐)나라에서 이세민(李世民)을 보내 뤄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자 그는 병사를 이끌고 가서 구하려 했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패하여 장안(長安)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河州梁師都、饒州林士弘、源州李軌、湖州沈法興、?州徐圓朗、楚州朱燦、登州李子通、濟州輔公佑、山後劉武周、建州劉黑?、西城韓世充、揚州宇文化及우문화급 선조는 흉노족(匈奴族)이며 대군(代郡) 무천(武川 지금의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 속함) 사람이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인 우문술(宇文述)의 아들로 양제(煬帝) 때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을 지냈다. 618년 무분랑장사(武賁郞將司) 마덕감(馬德戡) 등과 함께 강도(江都)에서 정변을 일으켜 양제를 침소에서 교살했다. 이때 양제의 나이는 50세였는데 그후 양제의 일족은 모두 살해되었다. 수의 황족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은 양제의 조카인 진왕(秦王) 양호(楊浩)뿐이었다. 그는 우문화급의 아우인 지급(智及)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져 반란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우문화급 자신은 승상을 맡았다. 후에 우문화급은 10여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동산(童山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쉰 현[浚縣])에서 이밀(李密)·서세적(徐世勣) 등에게 대패한 뒤 2만 명의 잔여부대를 이끌고 위현(魏縣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다밍[大名] 동쪽)에 숨었다. 후에 양호를 독살하고 황제를 자칭하여 연호를 천수(天壽) 국호를 허(許)라고 했다. 619년 요성(聊城)에서 두건덕(竇建德)과 싸워 패했으며 우문화급과 그 일족 전부가 죽음을 당했다. 、蘭州薛擧。 18곳은 요동의 이밀 강남의 소선 유주의 유융진 명주의 두건덕 하주의 양사도 요주의 임사홍 워주의 이궤 호주의 심법흥 연주의 서원랑 초주의 주찬 등주의 이자통 제주의 보공우 사후의 유무주 건주의 유흑달 서역의 한세충 양주의 우문화급 난주의 설거이다. 當時那十八處煙塵 皆被唐太宗掃滅 混爲一統天下 建號大唐 其世系: 당시나십팔처연진 개피당태종소멸 혼위일통천하 건호대당 기세계 당시의 이 18곳 전쟁터는 모두 당나라 태종에게 소멸당해 섞여 하나로 천하를 통일하고 대당이란 호칭을 세우니 대대로 계통은 다음과 같다. 高祖 太宗 高宗 中宗 睿宗 玄宗 肅宗 代宗 德宗 順宗 憲宗 穆宗 敬宗 文宗 武宗 宣宗 懿宗 傳至懿宗已十六代 共二百五十餘年。 고조 태종 고종 중종 예종 현종 숙종 대종 덕종 순종 헌종 목종 경종 문종 무종 선종 의종으로 의종까지 전해짐이 이미 16대이며 모두 250여년이다. 欲知後事 且看下回分解。 뒷일을 알려면 잠시 아래 2회 분의 해설을 들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