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
『로드』 이후 16년, 그가 남긴 마지막 걸작
『스텔라 마리스』와 함께 작가 인생 60년을 집대성한 결정체
2023년 6월 13일,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서부의 셰익스피어’ ‘포크너와 헤밍웨이의 계승자’라 불리며 해마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작가 코맥 매카시가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는 2022년 매카시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이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로드』 이후 16년 만에 남긴 장편소설로, 삶과 죽음, 세계의 절대적 진리와 유한한 인간 존재 등 그가 작가 인생 60년에 걸쳐 쌓아온 작품세계가 집대성된 결정체와도 같은 작품이다.
1980년대부터 구상해왔다고 알려지며 무성한 소문 속에서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들의 정체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2015년, 그의 데뷔작 『과수원지기』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였다. 작업중인 작품에 대해 거의 밝힌 적이 없던 매카시의 신작 제목 ‘패신저’와 몇몇 구절이 공개된 것도 놀라웠지만 평생 노출을 극도로 꺼리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던 그가 작품의 등장인물을 직접 소개했다는 사실은 독자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고, 그로부터 7년 뒤 공개된 연작 형식의 두 장편소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는 대작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만드는 데 일조한 과학자 아버지를 둔 남매가 각각의 주인공인 두 작품은 작가가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온 수학과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가 평생 천착해온 주제의식을 총망라하면서도 새로운 획을 긋는 이 작품들은 “이미 걸출한 작품 목록에 더해지는 훌륭한 신작이자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매카시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다는 증거”(NPR) 등의 극찬과 함께 출간 즉시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60년에 걸친 작가로서의 여정에 묵직한 마침표를 찍었다.
추락한 비행기. 아홉 구의 시체. 사라진 승객 한 명.
잃어버린 존재를 안고 불가해한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
『패신저』는 웨스턴 남매의 오빠 보비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로, 여동생 얼리샤가 죽고 약 10년이 지난 1980년을 배경으로 한다. 과거 촉망받는 물리학도였던 보비는 얼리샤를 마음에 묻은 채 바닷속에 잠긴 화물이나 각종 유실물을 탐사하고 건져내는 인양 잠수부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새벽 그는 동료 잠수부와 함께 바닷속으로 추락한 비행기를 조사하게 되는데, 일곱 명의 승객과 조종사와 부조종사의 시체가 함께 발견된 비행기 내부에는 수상하게도 조종사의 운항 가방과 블랙박스가 사라지고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비의 집에 정장을 입은 요원 두 명이 찾아오고, 보비가 없는 사이 이미 집을 수색한 두 남자는 비행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승객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보비는 비행기 추락 사건에 모종의 음모가 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고, 함께 잠수를 했던 동료이자 친구 오일러가 베네수엘라에 일하러 갔다가 사망하면서 사건에 대한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추락한 비행기와 거기에 얽힌 미스터리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면 작품에 살을 붙이고 풍성함을 더하는 것은 주인공 보비 웨스턴이 등장인물들과 나누는 대화다. 코맥 매카시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녹스빌과 작가가 된 뒤 거주한 적 있는 뉴올리언스 프렌치쿼터의 레스토랑과 술집들을 배경으로 동료 잠수부, 동네 친구들, 사설탐정 등과 나누는 대화는 다채롭고 광범위한 화제를 넘나든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자동차경주 선수로 활동하다 현재는 잠수부로 일하는 보비의 인생과 관심사를 반영한 이야기부터 20세기 중후반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남매의 아버지가 개발에 일조한 원자폭탄에 관한 이야기까지, 작가가 평생 관심을 기울이고 파고든 주제가 반영된 이 대화들은 독자로 하여금 죽음과 삶, 신과 우주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만든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를 연결하는
그리움과 상실감, 그리고 고통스러운 슬픔
간밤에 눈이 가볍게 내려 얼어붙은 머리카락은 황금색 수정 같았고 두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돌처럼 단단했다. 노란 장화 한 짝은 벗겨져 몸 아래 눈밭에 서 있었다. 던져놓은 코트는 눈에 살짝 덮여 형태를 그대로 드러냈고 그녀는 하얀 원피스만 입은 채 겨울나무의 헐벗은 잿빛 기둥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약간 틀어 손바닥을 드러낸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어떤 성당 조각상들처럼 자신의 역사를 생각해달라고 청하는 자세였다. 세상의 깊은 토대를, 세상이 그녀의 피조물들의 슬픔 속에서 존재를 얻게 되는 그곳을 생각해달라는 자세. 본문에서
『패신저』는 보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은 다름 아닌 『스텔라 마리스』를 이끌어가는 여동생 얼리샤의 죽음이다. 춥고 황량한 어느 크리스마스 날, 스무 살의 나이에 눈 덮인 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얼리샤는 보비의 남은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실감과 고통스러운 슬픔을 남긴다.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애를 죽게 했다는 보비의 자책과 후회는 깊어져만 가고, 보비는 “내 인생에서 너를 제외하면 모든 게 사라졌다”고 읊조리면서 스스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얼리샤의 존재는 『패신저』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드러난다. 총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마지막 장을 제외한 아홉 개의 장에 특별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조현병 진단을 받은 얼리샤가 열두 살 때부터 장기간 겪어온 환각에 대한 것이다. ‘키드’라 불리는 존재와 그가 이끄는 무리는 얼리샤의 삶에 아무때고 등장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이 장면들은 『스텔라 마리스』에서 얼리샤가 의사와 나눈 대화와 연결되며 두 소설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순환시키면서 하나로 엮어낸다.
인생이란 수수께끼야. 그거 알고 있었어?
그게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인지도 모르지.
보비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뚫고 움직이며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탐사하고 인양하는 일로 먹고살지만 실은 심해에 대한 공포를 품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과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캄캄한 물밑은 보비에게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견뎌내야 한다는 면에서 마치 인생과도 같이 느껴진다. 좋은 작가란 “삶과 죽음의 주제를 다루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는 매카시는 『패신저』에서 죽음은 물론이고 삶과 이 세상에 대한 문장을 여러 번 쓰고 있는데, 그 핵심은 결국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절대 알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아무리 상상해봐도 그걸 정확하게 알 가능성은 크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뿐 아니라 심지어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
이 책을 옮긴 정영목 교수가 옮긴이의 말에서 쓴 것처럼,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가 공유하는 기반이자 작품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현대 물리학은 “우리가 이전에 알던 세계의 확실성을 무너뜨리는 이론들을 생산하는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확실하든 확실하지 않든 그 세계 전체를 물리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폭탄도 생산했”다. 그 불확실성과 불가해함 속에서 보비는 어두컴컴한 물속을 가르고 나아가듯 홀로, 오로지 홀로 살아간다. 때때로 두려워하고 종종 자책하며 늘 슬퍼하면서.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