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보로망’의 선구자이자 전방위 예술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실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진』은 20세기 중반 파격적인 문학 실험으로 ‘누보로망(새로운 소설)’을 선도한 프랑스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가 198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양성적 매력을 지닌 젊은 여성 진Djinn에게 이끌려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활동하다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년 시몽 르쾨르의 기묘한 행적을 강렬한 필치로 그려냈다. 수수께끼의 인물이 거듭 등장하고, 방향 감각을 잃은 이미지와 혼란스러운 시공간이 펼쳐지는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주인공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점점 가중시키면서 압도되어가는 느낌을 선사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프랑스어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을 받아, 미국 대학생들을 위한 프랑스어 문법 교육용 텍스트로 집필한 『면접』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여 새로이 펴낸 소설이라는 점이 특이한데, 총 여덟 장으로 구성되어 프랑스어 문법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애초에 프랑스어 문법 학습서로 집필되었으나 오락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소설로 탈바꿈한 『진』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은 로브그리예의 실험정신이 낳은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어 문법을 소설의 원동력으로”
마침내 실현된 로브그리예의 오래된 프로젝트, 『진』
누보로망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고무지우개』로 1954년 페네옹상을 수상하고 『엿보는 사람』으로 1955년 비평가상을 수상한 이래 『질투』 『미궁 속으로』를 발표하며 누보로망의 대표 작가로 자리잡은 알랭 로브그리예. 줄거리의 명시적 전개나 성격의 주관적 묘사, 연대기적 질서 없이, 사물과 인물을 시각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전지적 작가를 전제하는 전통 소설에 반기를 들어, 앙티로망(반反소설)이라고도 불리는 누보로망의 기수로 일컬어진다. 당시로선 생경한 문학 실험으로 열렬한 호평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그는 누보로망을 대변하는 작가이자 문학이론가로서 세계 각국을 누비며 강연 활동을 벌여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한국에도 1978년과 1997년에 찾아와 각각 ‘누보로망과 누보시네마’ ‘누보로망에서 새로운 자서전으로’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을 정도다. 『진』은 로브그리예의 이런 국경을 넘나드는 활약에서 비롯한 작품으로, 그가 예순을 앞둔 1981년에 출간되었다.
2001년 발표한 『여행자, 텍스트와 한담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는 『진』의 집필 계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처음에는 무모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현대소설에 관한 강의를 했었어요. (……) 거기서 저는 미국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데 사용되는 책에 대한 문학적인 관심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프랑스어 교수들을 만났죠. 난이도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문법을 소개하기 위해 위대한 작가들의 텍스트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15년 이상 떠올려온 제 오래된 프로젝트들 중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어 문법을 소설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프랑스어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을 받은 로브그리예는 프랑스어를 익히려는 미국 대학생들이 활용할 만한 일종의 ‘교과서’로 『면접』을 집필하고 1981년 미국에서 출간했다. 학기당 8주에 해당하는 여덟 장에 걸쳐서 프랑스어의 문법적 난이도가 규칙적으로 증가하고, 이야기가 문법 활용과 맞물려 전개되는 이 책에는 각 섹션마다 연습문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면접』에서 연습문제를 덜어내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앞뒤로 덧붙인 후 제목을 ‘진’이라 바꾸고는 프랑스의 미뉘 출판사를 통해 다시 선보였다. 프랑스어 학습용 교과서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전개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진』은, 집요한 묘사가 지속되어 지루하다거나 읽기 난해하다고들 하는 누보로망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이색적인 걸작이다.
“시간을 벗어나, 나 자신 행방불명이다”
나와 너, 꿈과 현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과 구십구 쪽 분량의 타자 원고를 남기고 시몽 르쾨르라는 청년이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라진다. 미국인 학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가르치다가 돌연 종적을 감춘 그가 남긴 문제의 원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몽은 구인 광고를 보고 약속 장소인 어느 황폐한 창고에 찾아가 보스턴 악센트를 지닌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미국 여성 진을 만난다. 그녀는 시몽에게 자신이 속한 조직(기계화에 대항하는 비밀조직)을 위해 미션을 수행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즉시 밝혀지진 않는다. 진의 지시에 응한 시몽은 임무를 수행하려 파리 북부역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걷다가 소년 장이 불쑥 뛰어나와 넘어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죽은 듯 쓰러진 장을 품에 안고 건물에 들어간 시몽은 장의 누이인 소녀 마리를 만난다. 장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한다며 황당무계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마리는 진의 편지를 시몽이 읽게끔 유도하고, 진의 지령에 따라 두 아이는 시몽을 레스토랑에 데려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데……
여성인지 남성인지 혹은 마네킹인지 로봇인지 모를 모호한 캐릭터의 등장, 거울 속에서처럼 반복되는 이미지, 과거와 현재, 미래의 혼재 등이 특징인 『진』은 독자들에게 혼란스럽고 혼미한 시공간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런 느낌을 더욱 심화시키는 데는 특유의 시점과 프랑스어의 시제 변화도 일조한다.
이 소설의 프롤로그가 누구인지 모를 ‘나’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졌다면 제1장에서는 1인칭 화자(시몽 르쾨르)가 현재시제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현재시제에다 제2장에는 복합과거, 제3장에는 반과거, 제4장에는 단순과거와 대과거 시제가 등장하며, 문법 난이도를 높여가는 식으로 서술된다. 제6장과 제7장은 제5장까지와는 다르게 3인칭 과거 시점으로 시작했다가 1인칭 현재 시점으로 바뀌고, 다시 3인칭 과거 시점으로 돌아온다. 제8장에서는 느닷없이 여성 화자가 등장해 1인칭 시점으로 여러 시제를 구사하며 이야기를 전개시키기도 한다. 프롤로그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 ‘나’의 내레이션이 담긴 에필로그로, 이 소설은 풀리지 않은 의문을 독자에게 수수께끼로 남긴 채 마무리된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으로도 일세를 풍미한 로브그리예의 작품답게 『진』은 강렬하고 인상적인 상황 연출과 신비로운 분위기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선글라스를 착용한 인물, 폐기 처분된 상품과 고장난 기계장치로 가득한 마네킹 창고, 폐가들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길 등의 이미지가 거듭 등장하거나 혼령 같은 캐릭터가 무시로 출몰하며 독자들의 뇌리에 잊히지 않는 잔상을 새기는 식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곡가 린지 비커리는 『진』에서 영감을 받아 어둡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오페라 누아르 〈면접〉(2001)을 만들어 상연하기도 했다.
『진』은 1993년 세계사에서 발간한 『어느 시역자』에 표제작과 함께 ‘진느’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는데, 이 책은 무려 30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번역이다. 2011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엿보는 자』 이후 12년 만에 번역 출간된 로브그리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