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마음’으로 바라본 시인의 초상,지친 삶을 다독이는 위안과 성찰의 말들
문학평론가 노지영의 다정다감 문학 대담집
이문재, 손택수, 신용목, 김해자, 김경인, 김정환, 강은교, 김기택
우리 시대의 시인 8인에게 묻다
2010년 〈내일을여는작가〉 등으로 데뷔해 진지한 사유와 탄탄한 문장으로 동시대 문학의 지형도를 조밀하게 읽어온 문학평론가 노지영의 문학 대담집 『뒤를 보는 마음』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살피고 염려하고 상상하는 ‘시의 마음’으로 이문재, 손택수, 신용목, 김해자, 김경인, 김정환, 강은교, 김기택 등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여덟 명을 만나 시의 창작 과정, 시의 본질과 근원을 들여다보며 시가 우리 삶에 주는 의미를 되새긴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돌아보는 팬데믹 시대를 돌파하는 입체적인 사유를 탐색하기 위한 작업으로 본 대담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시라는 이름으로 나를 다독여주었던 시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겹의 내포를 읽어내기 어려워하는 신문맹의 시대에 시의 미학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문화향유 현장에서 작가와 독자의 가교 역할을 해온 저자는 이런 질문들을 끌어안고 2021년 봄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두 해 동안 시의 안부를 묻는 일에 몰두했다.
시적 개성과 목소리가 뚜렷한 시인들을 장소와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찾아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시’라는 것이 내뿜는 생기를 복원하고,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시인의 시가 탄생된 작업 공간을 취재하고, 그 현장에서 시학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면서 시인들의 자취를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해당 대담마다 사진작가가 동행하여 시인의 작업실과 시적 영감을 주는 시계(詩界)의 풍경들을 담아내기도 했다. 작품을 말하는 시인의 얼굴을 다양한 각도로 촬영하고, 시의 양분을 전달해준 ‘손’의 형체들을 현상하기도 했다. 시인의 에스프리가 담긴 육필 메시지도 매 원고마다 간직해두었다. 원로 시인들의 경우, 생애사 자료를 정리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뒤를 보는 마음』은 문단의 중진이자 현업 원로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시의 영역을 확장해온 여덟 명의 시인과 함께 시의 본질과 미학을 탐구하는 대담집이다. 시를 사랑하거나 시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시가 우리 삶에 주는 위로와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라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서서뒤를 돌아다보는 시간을 열어줄 거라 믿습니다.”
나에게 시란 이런 것이다……뒷날의 세상을 상상하며 미등을 켜는 마음
시인은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 부조리와 희망, 무상함과 허무 등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궁구하는 존재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첫 대담자 이문재 시인과의 만남은 코로나가 재유행할 무렵 대학 카페에서,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성찰해온 그는, 최근 관심사인 ‘전환’을 화두로 문학과 현실의 거리를 고민하며, 시의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성찰하는 시민의 글쓰기를 통해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시학이란 바로 생명을 옹호하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오래된,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갈 이 핵심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 시학이 시를 살아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관계의 시학’ 혹은 ‘지구적 상상력’이라고 부릅니다.
_「생명에의 옹호, 이문재」, 본문 중에서
손택수 시인은 일터에 출근하기 위해 매일매일 산길로 걸어다닌다. 그가 즐겨 하는 산책은 초혼하듯 시를 부르는 순간이자 시의 이슬이 맺히는 자리이다. 사무실에 걸린 달력 뒷면에는 입이 하나, 귀가 세 개인 섭(囁)’이라는 한자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그는 ‘섭’을 올려다보며 머뭇거리면서, 더 자주 멈추면서 더 많이 듣자는 삶의 태도를 새긴다. 이와 더불어 노작홍사용문학관의 살림을 맡으며 기림과 기억에 관한 여러 경험담을 들려준다.
세상의 모든 완성된 시들은 결국 미완성이라는 이야기죠. 이때의 미완은 불완전으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도래하는 미래의 시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미완을 가리키기도 하겠죠.
_「달력의 이면, 손택수」, 본문 중에서
신용목 시인과의 대담은 그가 일하는 대학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나무로 된 웬만한 소품들은 직접 만들 정도로 그는 나무의 질감을 좋아한다. 소시집 『나의 끝 거창』을 쓰면서 마음뿐 아니라 시작 스타일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그는 이제 예전의 초조함이나 무게감을 좀더 덜어내고, 사소하고 일상적이고 날것 같은 느낌이나 감촉을 시의 발화점으로 삼으려 한다. …
세상의 언어가 다 타버린 다음에도 출렁이고 있는 바다 같은 게 있다면 그것이 시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슬픔이나 고통이 있다고 할 때, 제가 그 슬픔과 고통을 쓰는 게 아니라, 시가 그것을 저에게 허락하는 거 같다고 느끼거든요. 시는 그렇게 출렁여도 된다고 허락하는 존재죠.
_ 「시인은 그렇게 살겠지, 신용목」, 본문 중에서
김해자 시인은 초보 농사꾼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이웃들과의 다정한 이야기와 시에 대한 뭉근한 사유를 들려준다. 그는 자신의 시가 어떤 개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았던 장소와 함께한 사람들을 따라 이동하고 변화해온 듯하다고 고백한다. 신비와 경외감을 자신을 살게 하는 중요한 자양분이라 말하는 그는 시가 합창이 되고 한 무더기의 춤이 되길 바랐던 시 쓰기의 첫마음을 순전한 몸의 언어로써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미래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게 말을 거는 것, 칠흑 같은 안개 속에서 깜박깜박 경고등을 켜는 것, 내가 앞사람을 따라가듯,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불을 비춰주는 것, 저는 그런 것이 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집으로 가는 길, 김해자」, 본문 중에서
김경인 시인의 일상을 채우는 장소는 집과 연구실과 스터디카페다. 시는 주로 스터디카페에서 쓴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홀로 깨어 있는 기분으로 밤새 시를 쓸 때의 기쁨은 생활 세계와 창작 세계를 분리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시인은 불투명한 것들 속에서 투명성을 발견하는 성찰을 통해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감각하는 시 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불투명한 세상 가운데서도 어떠한 투명성을 가져야 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런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라서, 저는 시를 쓰는 것 같아요. 너무나 불투명한 것들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투명한 것을 찾으려 하는 과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력이기도 하니까요.
_「겹의 그늘을 읽는 일, 김경인」, 본문 중에서
김정환 시인과의 대담은 “음악으로 커튼을 친” 그의 자택 서재에서 이루어졌다. 문학의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그 언어를 충돌시키거나 융합하는 방식으로 상투성에 저항하고, 단형시의 완결적 미학이 강조되는 한국 시단에서 예외적으로 장시 창작을 지속하고 있는 그의 문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풀어진다. 그는 축소화된 채로 퇴행하는 출판 현실을 향한 따끔한 조언과 아울러 기본을 전제로 한 비평가의 성실한 책무를 당부한다.
뭐 하러 시를 쓰고 글을 씁니까. 끊임없이 달라져야 하는 거죠. 누가 나보고 변했다고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나는 야, 그렇게 변하려고 기를 쓰는데 사람 변하는 게 그렇게 힘들더라, 오히려 이렇게 답변해요. 그렇게 변하려고 기를 쓰는데도 못 변하는 게 큰 문제입니다.
_「번역들, 김정환」, 본문 중에서
강은교 시인과의 대담은 부산 범어사 근처의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범어사길은 시인이 소중히 여기는 산책로 중 하나다. 시집과 산문집 등에도 범어사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한국적 서정에 바탕한 시적 사유를 통해 반백 년의 시력을 이어오며 의미의 모험과 ‘들여다봄’의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시인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시라는 건 모범 답안이 없잖아요. 서정성도 있고 사상성도 있고 이런 것이 적당히 모두 있어야 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모범 답안을 우리가 늘 가정하곤 하는데요. 예술이라는 것은 모범 답안이 없을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_「강은교 포에틱 유니버스, 강은교」, 본문 중에서
김기택 시인과의 대담은 그가 일하는 대학의 연구실과 휴게실에서 이루어졌다. 중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렸던 소년이 회사원이 되어 그 시절을 통과하며 시 쓰기를 이어온 내력과 함께, 한 편의 시가 착상되는 순간부터 시어의 외투를 입는 과정, 창작자의 윤리적 고민들이 풀어진다. ‘사물주의자’로 알려진 김기택 시인에 대해 노지영은 ‘만물주의자’로 새롭게 명명한다.
사람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시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시에서 사물은 존재를 끌어내는 매개체로서 기능하는 것이죠. 저는 시 쓰기가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생명체’, ‘무엇으로든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느낌으로서의 유동체’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라 생각해요.
_「시인의 둘레길, 김기택」,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