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둘레길은 역사의 현장이며 향토 스토리의 보고다
길 경쟁 시대다. 건강 걷기 시대다. 전국 어딜 가도 둘레길 없는 곳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쉽게 걸을 수 있다. 길은 있는데 없는 게 하나 있다. 스토리다.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없다니? 없는 게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발굴하고 정리해서 알려주지 않을 뿐이다. 왜 그럴까? 길 위에 스토리를 입히는 일은 들인 공에 비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려주어야 하는데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이다. 누군가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이유다.
전국 지자체별로 둘레길을 만들었지만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길은 드물다. 호기심에 한두 번 찾고 다시 찾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길만의 색깔과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색깔이 뭘까? 길 존재가치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정체성이다. 스토리는 정체성에 걸맞는 이야기다. 전국 둘레길 중에서 길 정체성과 스토리를 제대로 갖춘 길이 몇 개나 되겠는가? 국내 이름난 길을 걷고 온 자에게 뭘 보고 왔느냐고 물어보니 맛집과 풍경 사진만 보여준다. 이게 둘레길 현실이다.
걷기 흐름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누가 얼마나 많은 길을 빠르게 걸었느냐가 자랑이었다면, 이제는 이야기 있는 길을 찾아가는 스토리 투어로 바뀌고 있다. 흐름을 반영하듯 지리산 둘레길 개척자 전범권은 “지난 10년은 걷는 데 의미를 두었지만 앞으로 10년은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를 되새기는 스토리를 입혀 명품 길을 만들겠다.”고 했다.
원주에도 둘레길이 있다. ‘원주 굽이길’과 ‘치악산 둘레길’이다.
필자는 2021년 원주 굽이길을 걸으며 길 위의 역사 인물과 문화유적 이야기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졸저 《섬강은 어드메뇨 치악이 여기로다》는 분에 넘치는 호평을 받았다. 책 발간 덕분에 강의도 했고 원주를 찾아오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관광 홍보대사 역할도 했다.
2021년 6월 11개 코스 140km 치악산 둘레길이 완전히 개통되면서 스토리에 목말라하는 자가 늘어났다. 원주 굽이길에 이어 치악산 둘레길도 스토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내 달라고 했다. 책을 낸다는 건 발품과 자료 수집, 발간비용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벽이 많다. 향토 둘레길 이야기는 공공의 영역이지만 공공의 지원을 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몇몇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포기하고 있던 즈음 2022년 원주 비지정문화재 조사팀에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팀장인 원주 토박이 이희춘 교수, 윤선길 교수와 함께 원주의 문화유적과 역사 현장 60여 곳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울 수 있었다. 동시에 원주수요걷기회 장을 맡아 매주 한 번씩 회원과 함께 원주의 길(치악산 둘레길, 원주 굽이길) 전 코스를 차근차근 걸으며 지명유래와 역사 인물, 문화유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필자는 걷고 난 후 길 위의 역사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밴드에 올렸다.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리며 반응이 뜨거웠다.
“내 고장에 이런 역사 인물과 문화유적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그동안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지명유래도 모르고 살았던 게 부끄럽다.”는 자도 있었고, “글을 읽고 내가 원주사람인 게 자랑스럽다. 혼자 보기 아까우니 정리하여 책으로 펴내 달라.”는 자도 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책은 원래 원주 굽이길(원점회귀 코스)과 함께 담으려 했으나, 책 분량과 발간비용 등을 고려하여 아쉽지만 치악산 둘레길부터 먼저 펴내기로 하였다. 원주 굽이길 원점회귀 코스는 밤하늘 별처럼 보석 같은 이야기가 알알이 박혀있는, 묵혀두기 아까운 원고다. 머지않아 빛을 볼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격려 부탁드린다.
필자는 치악산 둘레길을 마지막 코스부터 첫 코스까지 역방향으로 걸으면서 마을 지명유래와 역사 인물, 문화유적 이야기를 찾아내어 양념을 치고 버무려 정갈한 밥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천년 고찰과 고승, 운곡 원천석과 태종 이방원, 수레너미재와 동학 교주 해월 최시형, 싸리치와 단종유배길, 선조계비 인목왕후와 영원사 동자승, 말치와 보부상, 황장목과 원주목사, 황골 엿과 저승사자 이야기 등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가 곳곳에 들어 있다.
필자는 자료수집을 위하여 책에 등장하는 역사의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양양 진전사 터와 여주 고달사 터, 문막 동화사 터, 소초 문수사 터 등 여러 폐사지를 다녀왔고, 여주 이포나루에서 영월 청령포까지 단종 유배길을 걸으며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였다. 운곡 원천석이 살았던 변암과 누졸재는 홀로 세 번이나 찾았으나 못 찾고 돌아오곤 했는데 비지정 문화재 조사팀 이희춘 교수와 동행하여 어렵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운곡이 태종 이방원을 가르쳤던 각림사 터는 우체국 한 귀퉁이에 작은 표지석만 홀로 남아 쓸쓸함을 더했다.
둘레길은 역사의 현장이며 향토 스토리의 보고다. 책 발간을 계기로 치악산 둘레길만 아니라 다른 지역 둘레길에도 풍성한 이야기가 넘쳐나 걷기 문화가 한 단계 발돋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이 도와주었다. 《원주 지명 총람》을 펴낸 김은철 교수는 두 차례 강의를 통해 지명유래에 눈뜨게 해주었고, 전 원주역사박물관장 이동진 선생과 옷 칠기 공예관장 김대중 선생은 운곡과 황장목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필자의 부족함을 채워 주었다. 원주 문화관광해설사 양한모·목익상·정태진 선생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함께 귀한 자료를 내어주며 가슴으로 격려해 주었다. 길 안내를 맡아 발품을 팔며 소중한 시간을 내어준 문막 토박이 양태화 선생, 원주문화원장 이상현 선생, 전 원주시 문화관광국장 신관선 선생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2년 원주시 비지정문화재 조사팀 이희춘 교수, 윤선길 교수, 구지현 교수의 노고도 잊을 수 없다. 출판계의 녹록지 않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원고가 빛을 볼 수 있도록 받아준 도서출판 북갤러리 최길주 대표께 특별히 감사드린다. 책이 많이 팔려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3년 11월 가을
섬강과 남한강이 몸을 섞는은섬포 흥원창 정자에 앉아
김영식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