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에리히 프롬(1900~1980)
자유自由로부터의 도피逃避(이스케잎 프롬 프리덤Escape from Freedom, 1941),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
봄에는 사랑이 싹트고, 여름에는 사랑이 꽃피고, 가을에는 사랑이 열매 맺는다. 그리고 겨울에는, 열매 맺은 사랑이 더욱 무르익거나, 열매 맺지 못한 사랑이면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대의 사랑은, 더욱 무르익고 있는가, 그리움만 깊어지고 있는가. 필자(筆者)로서는, 시나브로 그리움만 깊어지는 듯하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點)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어버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저 재미난 농담(弄談)쯤으로 웃어넘기기엔, 참으로 묘(妙)한 이치(理致)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分明)히 ‘님’과 ‘남’은, 거의 정반대(正反對)의 지점(地點)에, 배치(配置)된다고 할 수 있는 개념(槪念)들이다. 모름지기 현실세계(現實世界)의, 그 무수(無數)한 사람들 중(中)에서, 특정(特定)한 누군가를, ‘님’이라고 부를 정도(程度)면, 어지간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님’이, 단지(但只) 점(點) 하나 찍을 정도(程度)의, 사소(些少)한 상황(狀況)으로써, ‘남’이 되어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는 당신을 이해(理解)합니다’라는 말이 실상(實狀)은, ‘나는 당신을 오해(誤解)합니다’의 뜻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 또한, 선연(善緣)의 ‘님’이, 단지(但只) 점(點) 하나로써, 악연(惡緣)의 ‘남’이 되어버리는 상황(狀況)과, 유사(類似)한 맥락(脈絡)이라고 할 것이다.
분명(分明)히 누군가를,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한다고 확신(確信)하여서, ‘님’으로 삼은 것인데, 정작 그것은 오해(誤解)였으며,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瞬間), ‘남’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覺悟)할 정도(程度)로 사랑하다가, 죽을 때까지 백년해로(百年偕老)하겠다며 결혼(結婚)했다가, 그러다가도, 이제껏 이해(理解)한다고 확신(確信)했던 것이, 결국(結局) 오해(誤解)였음을 확인(確認)하는 순간(瞬間), 이별(離別)하고 이혼(離婚)하면서, ‘님’은 이내 ‘남’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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