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기억될 열세 살의 순간
흔들리는 오늘이 있기에 더욱 선명할 내일
마해송문학상, 정채봉문학상을 수상한 유영소 작가의 신작 동화집 『박하네 분짜』가 출간되었다. 마냥 어리지도, 그렇다고 아직 청소년도 아닌 6학년 여섯 아이의 여섯 가지 이야기가 담겼다. 소꿉친구 박하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미소,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자기만 외돌토리인 것 같은 지수,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연우, 얼떨결에 남자친구가 생긴 해린, 어긋난 친구 관계에 혼란스러운 이진, 이사와 전학을 앞두고 정든 동네를 돌아보는 나윤. 평범한 하루하루 같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툭 떠오를, 잊지 못할 성장의 순간이 펼쳐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고,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바로 오늘도 보통의 하루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길! 진짜 재미나길!_작가의 말에서
“아무나 좋아하지 말라고. 너를 존중하는 사람을 좋아해. 쫌!”
“너처럼?”
눈치 없는 너와 먹는 새콤달콤 분짜의 맛
#우정일까_사랑일까 #고백 #연애
어린이에게도 사랑과 연애는 정말이지 중요한 사건이다. 미소는 요즘 들어 소꿉친구 박하가 자꾸 떠올라 당황스럽다. 박하가 자기 엄마의 고향 필리핀에 다녀온 후로 키가 훌쩍 자라서일까? 아니면 친구 예지가 떠들썩한 공개 고백을 받아서일까? 중학교에 가기 전까진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하는 조급함에서일지도 모른다. 「박하네 분짜」는 누군가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간질간질한 감정,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하는 초조함을 찬찬히 보여 준다.
반면에 연애에 대한 또래 친구들의 높은 관심이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다. 「하필이면 까망」의 해린이는 친구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등 떠밀려 진서와 사귀게 된다. 하지만 막상 사귄다고 생각하니 진서가 갑자기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고 많은 색 중에 하필이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까만색” 옷을 입을 게 뭐람! 해린이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유영소 작가는 어린이들이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진짜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 마음, 내 생각을 먼저 헤아려 보고 싶었다.”
서먹해진 친구와 맞은 반짝반짝 첫눈
#친구 #우정 #전학
학교생활과 친구 관계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더군다나 전학으로 갑자기 낯선 공간, 처음 보는 친구들 사이에 놓이게 되면 난도는 더욱 올라간다. 진이는 6학년, 그것도 2학기에 전학 온 온이가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진이도 1학기 때 전학 와서 단짝 무리에 끼는 데 꽤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이는 단짝이 없어도, 혼자 밥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친구들과 억지로 맞추는 대신 내가 좋은 대로, 내 뜻대로 가뿐한 온이를 보며 진이도 점차 자기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김온 스타일」은 또래 사이에서 나만 겉도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어린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린다.
관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또 가까워지기도 한다. 「안녕」의 나윤이는 이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동네 산책길에 나선다. 약수터에서 떠올리는 유치원 때 친구 예주, 놀이터에서 마주친 지금은 서먹해진 윤지, 아파트 산책로에서 기억하는 반려견 별이……. 장소마다 한때는 전부인 것 같았던 존재들,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 있다. 나윤이는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친구들에게 인사하며 새로운 곳으로 나아간다.
『박하네 분짜』는 이사와 전학을 겪는 어린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찬찬히 풀어낸다. 그러면서 오늘은 비록 오해와 거절, 실수 등의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내일은 첫눈처럼 밝은 새날이 기다릴 거라고 조용한 응원을 건넨다.
“지금 엄마에게 나보다 엄마가 더 중요하다는 게, 속상하다.”
속상한 내 마음만큼 독한 염색약 냄새
#가족 #기억 #성장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는 아이들이 처한 밝지만은 않은 현실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빨강 머리 하이디」의 지수는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다. 이혼 후 새 가정을 꾸린 아빠와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엄마도 해외로 일하러 가면서 지수를 이모에게 맡겨 버린다. 하지만 묵묵하게 지수를 돌보아 주는 이모, 품이 넓은 이웃들, 오지랖 넓은 친구가 있기에 지수는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낸다.
「빨강 머리 하이디」의 지수가 가족 바깥으로 관계의 폭을 확장하며 위로받는다면, 「내가 기억할게」의 연우는 잊고 있던 가족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아이다. 연우는 새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문득 얼굴도 모르는 친아빠를 떠올린다. 엄마와 함께 북한에서 오다가 죽었다는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도중에 혼자가 되어 여기까지 온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빠의 사진 앞에 소국 한 다발을 내려놓으며, 연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자란다.
『박하네 분짜』에 담긴 여섯 편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다루되 섣부른 해답은 내놓지 않는다. 어린이 스스로 생각하고, 부딪치고, 깨달아 가는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아주 조금씩 씩씩해질” 수 있도록 믿어 줄 뿐이다. 무엇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독자의 마음에도 따스한 온기를 밝힌다.
남수 화가는 다감하면서도 재치 있는 그림으로 이야기의 장면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행간에 숨은 등장인물들의 사연,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나는 재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