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아 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 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그러나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새로운 면을, 아름다운 비밀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들이 시들하게 생각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할지라도 선입견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시들한 관계의 뜰에 생기가 돌 것이다.
내 눈이 열리면 그 눈으로 보는 세상도 함께 열리는 법이다. 인도의 명상가이며 철학자, 그리고 구루(영적인 스승)인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법을 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보는 일은 어떤 철학도, 선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에게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당신이 그냥 보면 된다.”
단순한 삶이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고 본질적인 삶을 이룬다. 가구나 실내 장식도 단순한 것이 부담이 적고 싫증도 덜 난다. 인간관계도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에서 보다 살뜰해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대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 그리고 타성에 젖은 습관과 둘레의 흐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헤어나려면 밖으로 눈을 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 아래서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적게 보고, 적게 읽고, 적게 듣고, 적게 먹을수록 좋다. 그래야 인간이 덜 닳아지고 내 인생의 뜰이 덜 시든다. 보다 적은 것은 보다 풍요한 것이니까.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데 있다.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조출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인생을 살 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