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가 지난날 몸소 겪었던 일들을 서술한 파란만장한 일대기(一代記)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지난날 몸소 겪었던 일들을 서술한 것으로, 부군(夫君) 사도세자가 부왕(父王)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참변을 주로 하여, 공적, 사적 연루(連累)와 국가 종사(宗社)에 관한 당쟁의 복잡 미묘한 문제 등 여러 사건들 속에서 살아온 일생사를 순 한글의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한 파란만장한 일대기(一代記)이다.
1762년 윤5월 13일. 양력으로 치면 대략 8월을 전후한, 삼복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릴 때다. 이 해는 특히 삼남에 큰 가뭄이 들었다. 오래 비 구경을 못해 마른 하늘에 뙤약볕이 내려쬐었다. 불구덩이에 빠진 듯 푹푹 찌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영조가 노구를 이끌고 이른 아침 경희궁을 나서 창덕궁 선원전으로 거동하였다. 대왕은 선원전을 거쳐 자기 전처의 사당이 있는 창경궁 휘령전으로 왔다. 휘령전은 사도세자의 처소인 덕성합(德成閤)과는 지척에 있다. 대왕의 거동을 듣자 세자는 바로 죽음을 예감했다. 대왕은 경화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하지 않던가. 대왕의 거동을 듣자 세자는 바로 죽음을 예감했다.
세자는 죽음의 그림자를 밟으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부왕 앞에 섰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하고 빌었다. 하지만 부왕은 용서하지 않았다. 세자는 스스로 목을 매기도 하고, 섬돌에 머리를 부딪기도 했다. 아무리 대왕의 명이라 한들 주위에서 세자의 죽음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목 맨 끈을 풀어주기도 하고, 실신한 세자에게 약을 먹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11살의 어린 손자 정조까지 시켜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했다. 영조의 결심은 반석 같았다. 세자를 죽이고자 한 뜻을 쉬 이루지 못하자, 급기야 뒤주를 가져오라 했다. 재촉과 만류가 되풀이되면서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었고, 세자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주에 들었다. 거구의 사도세자는 대왕이 직접 꽁꽁 봉한 작은 뒤주 속에서, 어둠, 무더위, 기갈을 이기지 못하고 아흐레 만에 죽었다.
혜경궁은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죽였건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저 자신과 아들을 살려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사건의 끝이 아니라 사건의 시작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조선 22대 왕으로 즉위하자 외가인 풍산홍씨의 집안이 몰락하게 되는데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이 외가이자 당시 정치적으로 노론이었던 풍산홍씨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정조 즉위와 함께 노론의 위세가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숙부인 홍인한이 처형되고 아버지 홍봉한까지 처벌을 받게되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몰락한 친정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을 탄원하였고, 정조가 이를 약속했다고 언급하며 임오화변은 자신의 친정집과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 《한중록》이다. 문체에 등장인물의 성격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 글을 통하여 조선 여성의 이면사(裏面史)를 엿볼 수 있다는 점과 당시의 정치풍토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