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과 구토로 미끄러지는 삶도, 유예할 수 없는 지금의 삶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투병기가 아니다
이 책은 15년이 넘게 섭식장애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섭식장애 당사자의 글이다. 저자 박채영은 섭식장애를 관계의 문제로 파악하며 접근해 들어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의 위한 식탁](김보람, 2023)의 주인공이고, 올해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섭식장애 인식주간’에 참여해 섭식장애 당사자로서 ‘납작하지 않은’ 이야기를, 섭식장애라는 질병의 이름으로만 똑같이 묶일 수 없는 질병 경험을 나눈 바 있다.
섭식장애 문제가 전에 비해 가시화, 사회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를 개인의 의지 문제, 외모에 집착하는 젊은 여자들의 문제, 다이어트의 부작용 정도로 바라보는 단편적 이해와 편견은 우리 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섭식장애에 대한 정확한 질병 통계조차 없어 의료 시스템 안에서도 그 자리가 매우 작다. 치료자를 경유하거나, 취재의 소재로 등장하지 않고 당사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흐름은 이제 겨우 발을 내디뎠다.
『이것도 제 삶입니다』 역시 섭식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로 질병과 함께해온 시간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투병기는 아니다. 질병을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 우리는 대개 누군가가 겪은 그 질병의 원인을 찾고, 그 증상을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매끈한 설명과 이야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비정상적 상태인 질병을 극복해 ‘정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섭식장애의 병증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거나, 질병을 ‘극복’하고 ‘치료’하는 데 매진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질병과 함께 살아온 오랜 시간과 경험을 마주하고 기록한 질병서사이며, 질병을 겪어내고 통과하며 확장된 삶의 기록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려 노력하기보다는 정상성이 무엇인지, 질병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나에게 주어진 밥을 남기고 먹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저자에게 그간 어떻게든 완수하려 했던, 세상이 내준 과제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타인을 중심에 두지 않은, 나를 중심에 둔 결정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단 한 번도 거부한 적 없는 엄마의 밥을 거부했다. 그것은 엄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선언이었다. 엄격하게 지킨 세밀한 식단의 통제는 단순한 거식이 아니었다. 폭력적이고 위계적 공간인 학교를 벗어난 한 명의 청소년이, 어찌할 줄 모를 혼자만의 긴 시간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규칙이었다. 거식 이후에 찾아든 폭식과 구토는 무력감과 불안으로 빠져드는 그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힘을 상기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우리는 유년 시절에서 이어지는 저자의 서사 속에서 삶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가 나로 살기 위해 싸우는 투쟁의 현장으로서의 몸과 섭식장애를 바라보게 된다. 또한 평생의 절반 이상을 섭식장애와 함께하며 실패와 좌절, 성장을 오가는 기록을 통해 질병이 단순히 개인의 몸에 국한해 벌어진 사건이 아니고, 관계와 사회라는 맥락 위에 놓여 상호작용하는 과정이자 결과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