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승려 ·학자로서 속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이고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이다. 그리고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경주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산시) 출생으로서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 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61년(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1268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1274년 비슬산 인홍사(仁弘社)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湧泉寺)를 불일사(佛日社)로 개명했다. 1277년(충렬왕 3)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1281년 충렬왕이 동정군(東征軍)을 격려하기 위하여 경주에 왔을 때 부름을 받고 이 인연으로 다음해에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되었다. 1283년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1289년 7월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