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을 5권 발표한 바 있는 소설가 박경범이 詩集을 냈다. 소설에서도 순수문학 판타지 공상과학을 망라하며 폭넓은 활동을 보인 그가 시집까지 냈다면 이제 또 詩에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이 아니냐고 묻게 된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번에 나온 시집 채팅실 로미오와 줄리엣 은 학창시절로부터 최근까지 20여년동안 틈틈이 써온 詩형식의 글을 모아둔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35세때부터 작가생활을 해온 박씨의 소설가로서의 활동과는 무관하고 박씨가 지금까지 만약 그대로 일반직장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책이라 할 수 있다. 수록된 작품의 대부분은 박씨가 과거에 누군가의 대상을 두고 쓴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시인이 인위적으로 지어낸 戀詩集과는 다르다. 남달리 다정다감한 한 청년의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의 서정시집인 것이다. 작가는 이미 출간된 자신의 소설들의 작품성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지만 이 시집에 대해서는 그렇게 시문학적인 의미는 두지 않는다. 상당수는 詩作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랑에 처음 눈뜬 20세 때부터 40여세에 이르기까지의 사랑에 관한 온갖 갈등과 방황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철학을 집약한 기록으로서 작가자신의 말마따나 주제넘은 표현을 빌자면 사랑과 인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잠언집(箴言集) 인 것이다.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