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 스스로 제 꿈을 이뤄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역할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에 몸 바쳤던 슈바이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또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 전쟁터까지 누비며 의료 활동을 펼쳤던 노먼 베쑨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성자’라고 불리우던 장기려 박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모두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위대한 인물들이지요. 하지만 조선 시대 말 낯설고 먼 나라에 와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치료하고, 젊은이들에게 지식의 힘을 심어 주며, 조선 사람 스스로 성장의 기쁨을 느끼고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 올리버 R. 에비슨 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올리버 R. 에비슨이 조선에서 40여 년의 시간을 보낸 뒤, 75세의 나이로 고국 캐나다로 돌아갈 당시 서울역에는 8백여 명의 사람들이 나와 그를 배웅했다고 합니다. 또 올리버 R. 에비슨이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부인 제니 반스와 함께 잠든 스미스 폴스 힐크레스크 묘지의 묘지명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BORN 1860 KOREA DIED 1956’ 올리버 R. 에비슨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 올리버 R. 에비슨을 기억하는 세 가지 열쇠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글로벌 리더의 본보기, 올리버 R. 에비슨을 소개합니다! 1. 고종의 시의가 되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의사이자 의과대학 교수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부와 명성을 얻은 올리버 R. 에비슨은 어느 날, 미국 출신의 선교사 호러스 G. 언더우드를 만나 그에게서 열악한 의료 환경의 ‘조선’에 대해 전해 듣습니다. 올리버 R. 에비슨은 ‘치료받기를 원하는 환자가 있다면 기꺼이 달려가는 것이 의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1893년 8월, 조선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의 옻 중독을 치료하고 신임을 얻게 되면서 시의에 임명됩니다. 한편 제중원의 책임자로 활동을 시작한 얼마 뒤에는 고종으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고 병실을 늘리고 수술실을 만들어 많은 환자를 수용하면서 제중원을 안정시켜 나갑니다. 이후 1895년 여름, 서울에 콜레라 번지자 조선 정부로부터 방역위원장에 임명된 올리버 R. 에비슨은 모화관 피난처를 세우고 위생 교육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성공적인 콜레라 방역 사업을 펼칩니다. 또, 1904년 조선의 의사로서 일본에 가 광견병 백신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 옵니다. 2. 백정의 아들을 의사로 키우다 서울에 도착한 올리버 R. 에비슨이 처음 만난 환자는 가장 낮은 신분의 백정 박씨였습니다. 그를 치료하며 조선의 신분 제도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던 올리버 R. 에비슨은 백정들이 권리를 찾는 데에 힘을 보탭니다. 이에 감동받은 백정 박씨 아니, 박성춘은 올리버 R. 에비슨에게 아들을 맡기는데 그가 바로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가운데 한 명인 박서양입니다. 일찍이 올리버 R. 에비슨은 조선의 역사에 대해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선은 목판 인쇄물과 금속 활자, 거북선을 만든 놀랄 만한 과학, 기술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특히 아름답고 값진 한글은 왕에서부터 백정에 이르기까지 동등한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조선만의 저력이었습니다. 올리버 R. 에비슨은 이런 힘을 가진 조선 사람들에게 의사가 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박서양을 비롯한 의학생들이 영어와 기초 과학 공부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김필순과 함께 거의 모든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 출판해 냅니다. 한편 올리버 R. 에비슨은 7년 과정의 교과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의학생들에게 공인된 의사 면허를 받게 해 주고 싶어, 고민 끝에 통감부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졸업식에 참석해 줄 것을 머리 숙여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이에 7명의 졸업생들은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7명의 졸업생 홍종은, 김필순, 홍석후, 박서양, 김희영, 주현칙, 신창희는 올리버 R. 에비슨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 사람의 건강을 돌보고, 조선인 의사를 키워 내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모두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습니다. 3.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세우다 올리버 R. 에비슨은 조선에 최신 설비를 갖춘 현대식 병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친구이자 건축가인 헨리 B. 고든을 찾아갑니다. 그에게서 첫 번째 기부로 병원 설계도를 받게 된 올리버 R. 에비슨은 1년 뒤 루이스 H. 세브란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조선에 현대식 병원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연설하는 올리버 R. 에비슨의 모습에 깊이 감명받고 병원 건립에 필요한 만 달러를 전액 기부합니다. 러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고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루이스 H. 세브란스의 지속적인 후원으로 마침내 1904년 9월 병원 건물이 완공됩니다. 바로 ‘세브란스병원’입니다. 1933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왔던 올리버 R. 에비슨은 어느덧 73세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조선 의학계에는 많은 조선인 의사와 교수가 배출되었고, 조선의 여인들은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올리버 R. 에비슨은 조선에서 꿈꾸던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건 명성도, 부와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학교와 병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올리버 R. 에비슨은 꿈을 이룬 뒤에는 그동안 자신이 일구었던 모든 것을 조선인들에게 물려주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조선에 온 목적이었습니다. 올리버 R. 에비슨은 반대를 무릅쓰고 세브란스병원장 및 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조선인 오긍선을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 12월, 홀가분한 마음으로 조선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