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박은식 | 소명출판 | 2008년 12월 15일 | PDF

이용가능환경 : Windows/Android/iOS 구매 후, PC, 스마트폰, 태블릿PC에서 파일 용량 제한없이 다운로드 및 열람이 가능합니다.

구매

종이책 정가 32,000원

전자책 정가 19,200원

판매가 19,200원

도서소개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한 피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를 통하여 국혼을 강조하고, 이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일제 침략으로부터 광복하기 위한 출발이었다. 광복을 위한 바로 독립을 달성하고자 벌인 ‘피의 투쟁의 역사’는 곧 로 나타났다. 이 책에서도 박은식은 에 이어 국혼론적 역사관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그는 나라가 비록 힘에 의해 병탄되었지만 종교와 역사와 언어와 문자와 풍속 속에 국혼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언어, 풍속, 예의, 의식 등을 독자적으로 유지하였고, 국성(國性)이 다른 나라와 구별되면서도 강한 국혼을 형성하여 다른 민족과 결코 동화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박은식은 이 책을 통해서도 국혼을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소개

저자: 박은식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이며, 필명으로 무치생(無恥生)·태백광노·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백치(白痴)를 사용했다. 그는 한국 근대사상 격동기에 활동한 유학자, 근대 학교 운동의 선구자, 교육 사상가, 언론인, 역사가로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국내뿐만 아니라, 격동하는 중국으로 1911년 망명한 후 그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어려서부터 주자학을 배우며 성장한 주자학자였으나, 변화와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주자학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陽明學)으로 학문적 전환을 결단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적 변화와 함께 1898년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그 후 경학원 강사,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면서 교육 개혁에 관한 글을 쓰고,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했다. 1905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보호국으로 만들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이를 비판했다. 그는 이후 복간된 <황성신문>에서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는 항일 언론 활동을 1910년 폐간될 때까지 펼쳤다. 또한 1906년 교육계몽단체인 서우·서북학회의 기관지인 <서우>·<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논설을 써서 계몽 활동에 진력하고, 서우사범학교·오성학교·서북협성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에 힘썼다.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해 유교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해 유교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에는 양명학 보급을 위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간행하고, 한문교과서 ≪고등한문독본≫을 저술했다. 병합 후에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의 집필을 위해 1911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의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했고,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그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때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을 집필했다. 1912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어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이 시기에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당소의(唐紹儀)를 비롯한 중국혁명동지회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를 간행했다.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 신규식,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또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강연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번역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했다. 1919년 3·1운동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았다. 이때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9년 8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서울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으며, 대한교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에 간행했다. 이후 ‘건국사’를 쓰고야 말겠다는 각오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11월 1일 서거했다.

목차소개

서언(緖言) 제1장 우리 민족의 간략한 역사 제2장 갑신년 독립당의 혁명 실패 제3장 갑오년 동학당의 대풍운 제4장 일본인의 민비 시해와 유림의 의거 제5장 독립협회 운동 제6장 일본인의 이권 침탈과 의정(議定) 6조의 강제 체결 제7장 보호늑약(保護勒約)에 대한 국민의 대통곡 제8장 만국평화회의 밀사 제9장 이토의 선위(禪位) 강요와 7조약의 강제 체결 제10장 이토의 군대 해산과 참령 박승환(朴勝煥)의 자결 제11장 각지 의병의 약력 제12장 이토의 육군?사법부 폐지 제13장 세계를 진동시킨 의협(義俠)의 소리 제14장 나라 병합 후에 순절한 여러 사람과 지사들 제15장 120인의 테라우치 암살 모의 사건 제16장 총독의 탐욕스럽고 포악한 행정 제17장 사법제도의 불법 제18장 헌병 경찰 기관의 확대 제19장 헌병경찰의 야만과 불법 제20장 각 관서의 한국인 배척 제21장 동양척식회사 제22장 한국인 기업을 억압 제23장 한국인의 사유재산 감시 제24장 교육의 동화정책 제25장 각 종교를 박멸한 정책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하편 제1장 물과 기름 같은 한국과 일본의 국민성 제2장 우리의 독립운동을 촉진시킨 세계 개조의 신문화 제3장 서울의 독립운동 본부와 내외의 학생 단체 제4장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된 태황제(太皇帝) 제5장 재외 한국인의 활동 제6장 독립본부의 시위운동 제7장 독립운동 일람표 제8장 의주?평양?진주의 운동 상황 제9장 미국 선교사의 수난 제10장 재외 한인의 독립 선포 제11장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과 각 기관 제12장 일본인의 야만적인 살육 제13장 일본인의 만행 제14장 일본인의 기만 술책 제15장 우리 대표들이 파리회의에 제출한 청원서 제16장 각 방면의 호소 제17장 각국 사람의 동의 제18장 부녀자와 아동들의 애국열 제19장 노협객 강우규의 사이토[齋藤] 저격 제20장 의친왕(義親王)과 대동단(大同團) 제21장 북한 지역 의병부대의 활동 제22장 여운형의 도일(渡日) 선전 제23장 일본 군인의 노령 한인 동포 학살 제24장 연통제에 대한 재판 제25장 대한광복군의 맹활약 제26장 서상한(徐相漢)?김영철(金榮哲)?박재혁(朴在赫)의 세 열사 제27장 미국 의원 내한(來韓)시의 광경 제28장 일본이 혼춘 사건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강점함 제29장 우리 의병이 네 번 싸워 네 번 이긴 뛰어난 전공 제30장 왜적이 우리 양민을 학살한 대참화 제31장 한일 간 전쟁 및 일군의 죄악에 대한 서양 신문의 평론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부록-세계 여론 1. 일본인의 침략, 포학과 한국 상하 인민의 저항을 논함 2. 한국의 자유전쟁 3. 미국 상원의 한국사정보고서 4. 임시정부 법률고문 미국인 도르퍼(Fred A.Dolph, 透兒波)의 보고 5.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압제를 받고 있는 한국인[`상해서보(上海西報)`] 6. 또 하나의 벨기에인가? 7. 조선의 독립운동(`뉴욕신문 New York Times`) 8. 한국의 진상 9. 중국에 중한친우회(中韓親友會) 설립의 필요성을 논함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결론

회원리뷰 (0)

현재 회원리뷰가 없습니다.

첫 번째 리뷰를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