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권16 219.『구당서』의 편찬 시말 220.『신당서』 221. 당나라의 실록, 국사는 모두 두 차례 산실되었다 222.『구당서』전반부는 실록, 국사의 구본을 모두 사용했다 223.『신당서』본기의 서술방법 224.『신당서』본기에서 안사의 난에 대해 쓴 대목 225.『신당서』에서 각 열전을 개편한 것 권17 226.『신당서』에서『구당서』를 증보한 대목 227.『신당서』에서『구당서』를 증보한 것 가운데 중요한 대목 228.『신당서』에서『구당서』를 증보한 것 가운데 잡다한 내용 229.『신당서』열전을 만들면서 유독 상세하게 쓴 대목 230.『신당서』에서『구당서』내용을 삭제한 대목 권18 231.『신당서』에서『구당서』문장의 뜻을 고친 대목 하간왕 이효공전 장손순덕전 허경종전 위척전 원재전 최광원전 당검전 왕웅탄전 위징이 태종에게 올린「충신·양신지론」 부혁의 불교를 없애기를 청한 상소 이광필전 노여필전 감로의 변란 232.『신당서』에서 변려체로 된『구당서』문장을 모두 삭제했다 233.『신당서』에서는 한(유)·유(종원)의 문장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234.『신당서』에서는 상소문을 상세하게 수록했다 235.『신당서』와『구당서』가 서로 다른 대목 236.『신당서』와『구당서』는 각각 본기와 열전이 서로 다른 대목이 있다 237.『신당서』와『구당서』가 틀린 대목 노경전 곽자의전 주도와 주차 238.『신당서』와『구당서』판각본에는 각각 빠지거나 틀린 대목이 있다 권19 239. 정관 연간에 올바르게 간언한 사람은 위징만이 아니었다 240. 시정기 241. 천자는 기거주를 보지 않았다 242. 당나라 황제들은 단약을 먹은 사람이 많았다 243. 현종은 오대가 한 집안에 살았다 244. 당나라에는 두 차례 `상원`이라는 연호가 있었다 245. 덕종은 시 짓는 것을 좋아했다 246. 이전 시대 충신과 간신에 대한 포폄 247. 시호에는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이 모두 있었다 248. 당나라 때 태자 호칭 추증의 지나침 249. 황제의 칭호로 황후의 시호를 표기했다 250. 황후 애책문의 존칭 251. 합장은 예법을 변통한 것이다 252. 종묘에서 황후의 시호를 울렸다 253. 두 태후를 나란히 칭한 경우 254. 황태후로서 합장하지 않은 경우 255. 이건성과 이원길의 아들은 주살되었다 256. 액정궁에 잡아들이는 경우 257. 당나라의 여화 258. 무후의 잔인함 259. 무후는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볼 줄 알았다 260.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고친 경우 261. 조회에서 하례를 올릴 때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먼저 예를 향했다 262. 대신에 대한 몸수색 263. 도첩 권20 264. 당나라 때 환관의 폐해 265. 환관이 (지방으로) 사신으로 나가고 군대를 감독함으로써 생긴 폐단 266. 당나라 환관에는 복건과 광동 출신이 많았다 267. 당나라 절도사의 폐해 268. 방진의 군대가 자기 영역을 나서기만 하면 탁지부에서 물자를 공급해 주기를 바랐다 269. 방진의 교만한 병사들 270. 도적이 재상을 살해한 두 사건이 있었다 271. 여섯 등급으로 죄를 정하고 사흘 만에 상복을 벗는 것에 관한 논의 272. 간가, 제맥, 궁시, 오방소사가 백성을 괴롭힌 예 273. 호사스러운 연회 274. 이름난 아버지의 자식 중에 도리에 어긋난 사람이 많았다 275. 이적의 자손 276. 안록산이 체포되어 서울로 보내진 일 277. 수양에서 순절한 사람으로 또한 요은이 있다 278. 당나라 초기 삼례,『한서』『문선』에 관한 학문 279. 당나라 때 고문은 한유와 유종원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280. 당나라 전후기에 쌀갑이 오르내린 액수 281. 장안의 땅기운 282. 황소와 이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