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회사에서 능력 있고 할 말 다 하는, 성격 꽤나 쿨한 커리어우먼으로
포장해서 잘살고 있는데 깡패 같은 본 모습을 들킬 수 없었다.
5년 간 이어온 가면을 벗으라는 건
그녀가 등에 업은 커리어를 내던지라는 말과 같았다.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어쩌지. 너무 멋있어서 이젠 못 놔주겠는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그의 뇌리에 박혀버린 ‘놀이터의 누님’.
히어로 같은 그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그의 단순한 호기심은
어느새 사랑이란 단어로 바뀌어 있었다.
<본문 발췌>
“오, 찾는 중이야? 이상형이 있어? 내가 찾아볼게!”
박 과장이 신난 듯 말했다.
“그래주실래요?”
“당연하지! 몇 달이긴 하지만 우리 직원 아니야! 대신 연애하게 되면 이야기 좀 들려줘! 늦가을 바람에 외로운 유부남 마음 달래준다고 생각하고! 이상형이 어떻게 돼?”
박 과장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관심을 드러냈다. 덩달아 직원들도 건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건혁은 곰곰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잔 입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상형은 딱히 없는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있었어요.”
회상에 잠긴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숨까지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소란조차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이어졌다. 혜련 또한 그들이 조성한 분위기 때문에 물잔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언제쯤 대화가 끝날까…….
따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혜련이 물잔만 들여다볼 때였다. 건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전 놀이터에서 고딩들을 혼내는 여자를 봤어요.”
혜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건혁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고딩들을? 이야, 요즘 조폭만큼 무섭다는 고딩을 때려잡는 여자가 있단 말이야?”
“네. 고딩들이 피우던 담배를 모두 압수해서 반으로 부수는데, 꽤 섹시하더라고요.”
“쿨럭! 쿨럭! 쿨럭!”
“에이, 뭐야. 신 팀장! 분위기 깨지게!”
박 과장의 타박에 마른기침을 내뱉던 혜련이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한참 있다가 고개를 든 혜련의 얼굴은 벌겠다. 정신 차린 후에 물만 벌컥벌컥 들이키던 혜련은 건혁을 쳐다보았다.
“건혁씨가 보기보다 거친 여자를 좋아하는 구나. 그래서? 그 여자 휴대폰 번호라도 땄어?”
박 과장이 꽤 관심 있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건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얼굴을 제대로 못 봤거든요.”
건혁의 말에 혜련은 참았던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하마터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얼굴을 못 봤으니 됐다. 죽어도 자신을 알아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 여자 찾아보려고요.”
그러나 이어지는 건혁의 말에 혜련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렸다.
이건혁, 아무래도 그와는 악연인 게 확실하다고 혜련은 생각했다.
“찾을 정도로 매력 있었던 거야?”
박 과장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만나서 대화를 한 번 나눠보고 싶을 정도로요.”
건혁의 깔끔한 대답에 박 과장은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었다.
“꼭 다시 만나길 바라겠어! 다시 만나면 이야기 들려줘! 기대되니까!”
“그러죠.”
“그 여자, 정상적인 여자는 맞아요?”
건혁의 입에서 여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입술을 삐쭉거리던 진 팀장이 말을 툭 던졌다. 건혁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진 팀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렇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고등학생들을 훈계하고 담배를 분지르는 행동을 한다면 멀쩡한 여자일 리가 없잖아요.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런 짓을 해요? 교양 없고 무식해보이게.”
여기 있는 여자가 그런 짓 한다, 왜?
울컥한 혜련이 눈에 힘을 준 채 진 팀장을 쳐다보았다. 진 팀장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간만에 올바른 소리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건혁이 빙긋 웃었다.
“그만큼 힘든 일이니 용기를 냈다는 거잖아요. 마음에 들어요.”
걱정 말라는 듯 덧붙이는 건혁의 말에 진 팀장은 못마땅하지만 할 말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