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아이덴티티. 깊이 우려낸 홍차와 같은 달콤 쌉쌀한 클래식. 처음 얼 그레이라는 홍차를 맛보았을 때의 일이다. 베르가못향과 허브향이 얼마나 입안을 싱그럽게 만드는 지 차 한잔을 마시는 내내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난 결국 일반적인 냄새를 향기로 만들어 내는 데메XX 향수 중 얼그레이 향을 사서 뿌리기도 했다. 그 향수는 여전히 내 책상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기분 전환엔 최고로 좋다. 이 글은 마치 처음 마셨던 얼그레이 티와 같은 느낌이다. 약간 틀어서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어쩌면 통속적인 드라마와 매우 비슷한 구조를 보이며, 그와 동시에 로맨스에서는 빠지지 않아야할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원고지 2500매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건과 수많은 인물들을 정성스럽게 묘사했는지 작가의 고생이 눈에 훤히 보일만큼이다. 적절하게 잘 배치된 복선들이 소소하고 충격적인 반전을 만들고, 그저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사랑이 전부가 아닌, 악역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들마저 상세히 다루고 즐거우면서도 가슴 아프게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이 매우 뛰어난 작가다. 이것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수많은 글을 쓰며 작가 스스로 고민하고 또 고뇌하며 품안에 돌을 진주로 만들기 위한 인내의 세월의 증명일 것이기에, 얼마나 많은 수련의 과정이 있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필력,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을 만큼 작가의 문장은 안정되어 있고, 편안하다. 아! 단점도 있다. 날씨도 쌀쌀하고, 옆구리가 가뜩이나 시린 판에, 이거 좀 너무 한 거 아니야? 보기 드문 장편 로맨스. 그 탄탄한 스토리를 받치는 건 뛰어난 캐릭터의 설정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색깔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우스꽝스럽거나 너무 색을 강조해 튀어버리는 일은 없다. 작가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내는 소리를 조율하는 지휘자처럼 강약을 조절하고, 갑자기 한 번씩 놀랄만한 북소리도 들려주며 독자들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다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괜스레 어렵거나 멋 부린 대사보다는 어쩌면 너무나 직설적이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연인들의 대화를 가감 없이 담아낸다. 이 부분은 사랑에 빠진 이들이라면 즐거울 수도, 그게 아닌 독자라면 좀 버티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분명 은근히 부러운 마음이 생겨버릴 만큼 애정표현들은 수위가 높은(?)편이다. 분량이 상당히 많아 걱정이 되신다면, 그보다 먼저 당장 앞에 놓인 일감에 주목하시길 바란다. 이 책은 한번 손에 잡기 시작하면 글의 끝을 보기 전 까진 절대 놓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독자여러분, 일단 꼭 할 일은 하시고 이 책에 조금씩 빠져들어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