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주로 불어로 저술을 남긴 독일 철학자이다. 그가 남긴 저술은 7개 언어에 20만 쪽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그의 전집이 20세기 초부터 정리중인데, 지금까지 평균 870쪽에 달하는 책 25권이 출판되었다.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학을 개발한 수학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미적분학에서 쓰는 표기법은 대체로 그에게서 나왔다. 여러 지방정부의 관료로 일하면서 유럽 전역의 정치인ㆍ종교인ㆍ지식인과 교류하면서 점차 유럽 지성의 큰 봉우리로 성장하게 되었다. 균열된 학문들 사이의 통합, 분열된 유럽 기독교 종파들 사이의 통합, 동양과 서양의 만남 등에 평생을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6살 때 만든 자동사칙연산기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38살인 1684년에 최초로 미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년 뒤에는 적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미적분법 개발에 관해 뉴턴과 우선권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라이프니츠가 뉴턴과 독립해서 미적분법을 개발한 것도 거의 분명하고 뉴턴이 미분을 먼저 개발한 것도 거의 분명하다. 뉴턴이 자기 연구 결과를 문서...형태로 외부에 먼저 발표하지 않았으며, 라이프니츠가 이미 뉴턴의 노트 일부를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이 사실을 숨긴 것 등이 분쟁의 화근이 되었다. 물론 라이프니츠가 본 노트는 그의 미적분법 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둘 사이의 논쟁은 영국 학계와 대륙 학계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뉴턴은 자신의 자존심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라이프니츠를 증오하게 되었고 서로 존경해 마지않았던 둘 사이는 완전히 균열되었다. 라이프니츠가 목적론과 기계론의 통합을 시도한 『형이상학 논고』(1868)를 발표하자 그는 본격 철학자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이후 『자연, 실체들 사이의 소통, 영혼과 몸의 결합에 대한 새로운 체계』(1695), 『동역학 시범』(1695), 『최신 중국학』(1697), 『새로운 인간지성론』(1704), 『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변론』(1710), 『자연과 은총에 바탕을 둔 자연의 원리』(1714), 『모나드론』(1714) 등을 저술하였다. 기계론과 목적론을 조화하는 과정에서 모든 물질 속에는 살아 있는 힘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물리학에서 '에너지'라 불리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운동량과 구별되는 에너지를 발견한 것은 라이프니츠주의자 에밀리 뒤 샤틀레(?milie du Ch?telet, 1706~1749)였다. 그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 원리』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프랑스 여성 물리학자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구성하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살아 있는 힘을 가진 원소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이것은 이후 물리학에서 '마당' 또는 '장'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이론은 현대 원자 이론을 예비한 이탈리아 물리학자 보스코비치(1711~1787)에게 영향을 주었고, 보스코비치의 이론은 다시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전자기장을 발견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또한 보스코비치 원자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통일장 이론을 개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양자포턴셜' 또는 '능동정보'를 주장한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 1917~1992)은 자신의 양자역학 해석이 라이프니츠에게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연철학 분야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영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21세기 우리는 아직 라이프니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더 많이 더 깊게 이해할 만한 철학자라는 것은 분명하다.(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주로 불어로 저술을 남긴 독일 철학자이다. 그가 남긴 저술은 7개 언어에 20만 쪽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그의 전집이 20세기 초부터 정리중인데, 지금까지 평균 870쪽에 달하는 책 25권이 출판되었다.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학을 개발한 수학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미적분학에서 쓰는 표기법은 대체로 그에게서 나왔다. 여러 지방정부의 관료로 일하면서 유럽 전역의 정치인ㆍ종교인ㆍ지식인과 교류하면서 점차 유럽 지성의 큰 봉우리로 성장하게 되었다. 균열된 학문들 사이의 통합, 분열된 유럽 기독교 종파들 사이의 통합, 동양과 서양의 만남 등에 평생을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6살 때 만든 자동사칙연산기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38살인 1684년에 최초로 미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년 뒤에는 적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미적분법 개발에 관해 뉴턴과 우선권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라이프니츠가 뉴턴과 독립해서 미적분법을 개발한 것도 거의 분명하고 뉴턴이 미분을 먼저 개발한 것도 거의 분명하다. 뉴턴이 자기 연구 결과를 문서...형태로 외부에 먼저 발표하지 않았으며, 라이프니츠가 이미 뉴턴의 노트 일부를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이 사실을 숨긴 것 등이 분쟁의 화근이 되었다. 물론 라이프니츠가 본 노트는 그의 미적분법 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둘 사이의 논쟁은 영국 학계와 대륙 학계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뉴턴은 자신의 자존심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라이프니츠를 증오하게 되었고 서로 존경해 마지않았던 둘 사이는 완전히 균열되었다. 라이프니츠가 목적론과 기계론의 통합을 시도한 『형이상학 논고』(1868)를 발표하자 그는 본격 철학자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이후 『자연, 실체들 사이의 소통, 영혼과 몸의 결합에 대한 새로운 체계』(1695), 『동역학 시범』(1695), 『최신 중국학』(1697), 『새로운 인간지성론』(1704), 『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변론』(1710), 『자연과 은총에 바탕을 둔 자연의 원리』(1714), 『모나드론』(1714) 등을 저술하였다. 기계론과 목적론을 조화하는 과정에서 모든 물질 속에는 살아 있는 힘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물리학에서 '에너지'라 불리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운동량과 구별되는 에너지를 발견한 것은 라이프니츠주의자 에밀리 뒤 샤틀레(?milie du Ch?telet, 1706~1749)였다. 그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 원리』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프랑스 여성 물리학자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구성하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살아 있는 힘을 가진 원소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이것은 이후 물리학에서 '마당' 또는 '장'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이론은 현대 원자 이론을 예비한 이탈리아 물리학자 보스코비치(1711~1787)에게 영향을 주었고, 보스코비치의 이론은 다시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전자기장을 발견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또한 보스코비치 원자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통일장 이론을 개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양자포턴셜' 또는 '능동정보'를 주장한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 1917~1992)은 자신의 양자역학 해석이 라이프니츠에게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연철학 분야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영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21세기 우리는 아직 라이프니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더 많이 더 깊게 이해할 만한 철학자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