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실체를 찾아 ‘인문학 속으로’ 떠난 러브 에세이
상처에 새살이 돋을 때까지 살며, 생각하며, 사랑을 배우다
철학에게 사랑을 묻다.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까요?”
“사랑은 저절로 할 수 있는 본능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기술이다.”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설파한 내용이다. 사업에 실패하면 원인을 찾아 고치려고 애를 쓰면서 정작 사랑에 있어서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사람들의 태도를 꼬집는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잘하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사랑할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시계추처럼 사랑과 이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사랑을 하며, 왜 나는 너를 만나서 사랑하고 싶은지 파고들어갈 때 사랑을 제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철학이 필요한 때이다.
사랑이 만연한 사회다. TV를 틀어도 온통 사랑타령이고,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을 외려 결핍으로 치부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만만하게 보다가 첫 사랑의 이별의 상처에 데고 나서야 사랑이 이렇게 아픈 것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많다. ‘아플수록 사랑이 깊어진다고 착각한다’ ‘사랑을 하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 착각하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사랑은 쿨한 것이라 자조한다’ 이런 것이 사랑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편견이 낳은 폐해들이다. 이 책은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사유하고, 정의한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통해 사랑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한다. 사랑은 ‘나’와 ‘너’에 대한 고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우주 안에 새로운 ‘지구’의 탄생과도 같은 대단한 일이다. 상대가 태양이 되거나, 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태양이 된다면 나는 그 주위를 맴돌 것이고, 달이 된다면 그는 나에게 얽매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한 존재로서 두 개의 지구가 공존하는 우주가 바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모르고서야 연애 심리서나 가이드서를 아무리 읽어도 사랑의 마스터가 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책이 흔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책처럼 끈질기게 사랑의 실체를 추적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철학자, 심리학자, 뇌과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의 톡 쏘는 콜라 같은 사랑의 정의부터, 소설, 영화 속에서 사랑의 실체에 근접한 가슴 울리는 장면까지 사랑에 대해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수많은 글들을 모으고 다듬었다.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기에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들을 모으고 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울러 읽었을 때에야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사랑을 잘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시대의 젊은이로서 ‘사랑’을 탐구하고자 했던 저자의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사랑을 배웠더라면 이렇게 방황하진 않았을 텐데
대부분 가슴 벅찬 사랑의 순간이나, 가슴 미어지게 아팠던 이별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항상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사랑이 이런 거였나’ 하는 충격과 혼란은 청춘의 상징과도 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저자 이인은 소신 있게 인문학도의 길을 가는 젊은이로서, 온종일 수많은 책들과 씨름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문학 책들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수많은 사랑의 정의였다. 그 글들을 통해 왜 사랑이 이렇게 아팠던 것인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 글은 사랑을 추적하는 그 길에서 왜 진작 사랑을 배우지 못했을까 하는 탄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지 못했기에 ‘사랑할 때 섣부르고, 함께할 때 서두르고, 이별할 때 서툴렀다.’
사랑을 하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너무 많다. 욕망, 외로움, 후회, 환상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과 미묘한 경계선 상에서 우리를 아프게 한다. 소위 사랑을 안다고 하는 사람도, 환상으로 포장된 드라마나 친구들이 전하는 ‘카드라’통신에 의해 잘못 배웠다. 한마디로 발로 배웠다는 뜻이다. 사랑은 단 맛이 아니라 쓴 맛이었다. 그러나 사랑에는 굉장한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 ‘나’를 알게 되고, ‘너’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게 됨으로써 인간은 사랑을 통해 성숙한다. 사랑을 할 때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절망의 순간에도 “삶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썼던 것처럼 저자는 외친다. 사랑을 배우면서 긍정할 때, 슬픔과 후회의 고랑에서 빠져나와 기쁨과 자유의 고원으로 오를 수 있게 된다고. “사랑이여, 다시 한 번!”
복잡한 애정촌에서 제대로 ‘사랑’하기
이 책은 사랑을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는다. 사랑이 이토록 불안해진 데에는 종교와 같이 사랑을 맹신하는 사회 현상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요즘 외로운 현대인들 사이에 연애가 신흥종교로 우뚝 솟았다. 종교가 하던 기능을 오늘날엔 사랑이 갈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지치고 고달플 때, 연애하면서 고통을 견뎌내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 사이에서 비신자들이 인정받지 못하듯이, 그 탓에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외롭고 괴롭다. “왜 연애 안 해요?”라는 질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연애를 한다는 것이 돈과 시간적 여력을 갖췄다는 능력의 표시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기도 한다. 연애를 하지 못해도 고통스럽고, 연애를 해도 행복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조건을 따지는 만큼 상대도 나를 재고 있을 거라는 불안감, 사랑은 언제든지 끝낼 수 있는 거라는 허무함, 최고의 상대를 선택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죄여오면서 사랑이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어떻게 발에 차이는 흔한 것이 되었는지를 진단하면서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이 책의 값어치가 빛난다. 저자는 이러한 때야말로 냉소를 떨쳐내며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단지 성욕을 채우고자, 지금 외로움을 가시게 하고자 남을 도구 삼는 건 짐승과 다름없다. 사회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할 때, ‘인간동물’에서 ‘인간’이 된다고 얘기한다. 본능이라 불리는 수많은 유혹과 성욕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인간동물이 아니라 사랑을 삶의 진리로 만들 때, 인간으로 주체화된다는 주장이다. 사랑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건이 생겨 둘이 되고 둘의 관계를 충실하게 이어갈 때, 사랑은 진리가 된다.
이 책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책을 뒤져봐야지만 볼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보석 같은 글’들이 실려 있다. 애간장을 녹이는 유행가 가사와 달리 가슴을 쓰다듬어 주며 진실로 우리를 올바른 사랑의 길로 이끌어줄 글들이다. 이 책이 미로 같은 인생의 길에서 고단한 방황을 끝내줄 사랑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