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소리꾼의 일생을 통해 판소리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판소리학회장을 역임한 저자는 "소리꾼"을 키워드로 전승예술로서의 판소리가 지닌 특징을 보여준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광대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를 꼽았다. 이 중에서 소리꾼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바로 득음이다. 저자는 소리꾼이 득음하기까지의 혹독한 과정을 생생한 일화를 통해 보여주고 득음 후에도 계속되는 독공(소리공부)의 노력을 묘사했다. 또한 진정한 소리꾼은 자신만의 사설을 창조하여 독창적인 바디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음을 강조한다. 요컨대 판소리란, 충분히 곰삭은 목소리에 스승에게 전승받은 소리를 당대의 대중과 소통하는 사설로 변이시켜 창조를 거듭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소리꾼의 일화와 소리의 현장을 그대로 옮긴 듯한 사설("판소리 한 대목")은 판소리를 멀게만 느꼈을 독자와의 간격을 바짝 좁혔다. 하늘이 준 목을 지녔다고 불린 김소희와 소리 임방울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타고난 목이 좋지 않았음에도 피나는 독공으로 자신만의 소리를 개척한 정정렬과 김연수의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최초의 여자 소리꾼 진채선, 약자의 서슬을 소리에 담아 표현한 박초월, 그리고 완창 발표회로 화제를 모았던 마지막 대가 박동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본문에서
득음이란 "소리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는 본래 소리꾼이 가지지 못한 "소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리꾼은 오랜 시간 동안 늘 소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아예 오랜 시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괜찮도록 성대를 단련해야 한다. 이때 소리꾼이 하는 훈련이 바로 성대를 단련해서 항상 목이 쉰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판소리가 기본적으로 거칠고 탁한 소리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판소리의 성음은 "곰삭은 소리", 곧 "충분히 삭은 소리"여야 한다고 한다. 소리를 수련한다는 것은 생목에 여러 가지 감정을 담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거칠고 얕았던 소리는 부드럽고 깊은 맛을 지니게 된다. 음식이 발효를 통해 맛과 향기를 갖게 되듯이 목소리도 수련을 통해 온갖 맛과 향기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판소리의 맛과 향기를 대표하는 것은 "슬픔"이다. 그러나 충분히 삭은 슬픔은 인간을 깜깜한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슬픔이 아니다. 슬픔이면서도 그런 슬픔을 준 대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다 가신, 그래서 그러한 상대마저도 이제는 용서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함께 껴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깃든 슬픔이다. _51~53쪽
목이 나쁘면 기교나 공력으로 소리를 한다. 판소리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좋아한다. 목이 좋은 사람은 목소리에 의지해 소리를 한다. 목소리가 너무 좋기 때문에 다른 것은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임방울 같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소리를 해도 좋았다고 한다. 그냥 소리를 내면 내는 대로 다 좋았다. 그러니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목이 나쁘면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목소리 외의 다른 방법을 탐구할 수밖에 없다. 정정렬이나 김연수는 그 과정에서 새로운 판소리를 개척했다. 그리고 소리를 갈고닦아 좋은 목소리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은 맛을 담았다. 그들은 이른바 공력을 닦은 것이다. 목이 나빴던 정응민의 소리가 현대 판소리의 중추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응민이 소리를 갈고닦아 거기에 오색찬란한 광채를 담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목을 지녔던 사람의 소리는 생명이 짧고, 목이 나빴던 사람의 소리는 오히려 생명이 길다는 이 역설은 판소리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판소리는 오히려 역경 속에서 빛을 더해가는 예술인지도 모른다. _112~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