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洪大容, 1731∼1783)
홍대용은 18세기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자로,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수촌(壽村) 마을에서 뒤에 나주 목사가 된 홍력(洪?)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에 벌써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고학(古學)을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남양주의 석실(石室)서원으로 김원행(金元行) 선생을 찾아가 10년 넘게 공부했다.
20대에 들어 스승 곁을 떠나서는 고향에서 천문학에 관심을 쏟고, 스물아홉 살에는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나주로 내려가 나석당(羅石堂) 선생과 자명종과 혼천의 두 대를 만드는 데 여러 해를 보냈으며, 고향집에 천문관측소 농수각(籠水閣)을 세워 이 기계들을 설치하고 천문에 힘을 쏟았다. 서른다섯 살 때 연행사의 부사가 된 작은아버지의 자제군관(子弟軍官)이 되어 북경에 가 두 달을 머물면서 천주당과 관상대를 견학하고, 관상대장인 독일 신부를 만나 담화했으며, 남천주당(南天主堂)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여 선교사를 놀라게 했다.
특히 북경 문화 거리인 유리창(琉璃廠)에서 만난 엄성(嚴誠) 등 항주의 세 선비와의 교우관계는 그를 사로잡아, 이들과 나눈 필담을 박지원(朴趾源)의 머리말을 받아 ≪회우록≫으로... 만들어 널리 읽혔고, 이 일은 북학파의 젊은 후배들을 자극하여 줄줄이 연행에 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뒤에 북학파로 이어졌다.
연행록을 정리하여 한문본 ≪담헌연기(湛軒燕記)≫를 이루고, 따로 한글로 쓴 ≪을병연행록≫은 2600여 쪽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여행록으로 남겼다. 이 밖에 심성론 등 유학을 다룬 ≪담헌서(湛軒書)≫,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