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름, 박완서
살아 있는 목소리로 다시 만나다!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생생한 경험담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눈, 소소한 일상에서의 아기자기한 이야기까지-
2011년 1월 22일, 한국 문단은 소중한 작가 박완서를 떠나보내고 큰 슬픔에 잠겼었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한국전쟁, 남북분단 등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던 박완서 작가는 1970년 불혹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하여 2011년 영면에 들기까지 40여 년간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2015년,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4년째를 맞았다. 더이상 그의 신작을 만날 수는 없지만, 그가 40여 년간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영원히 죽지 않는 작가가 되었다. 하여 해마다 그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그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소한 움직임들이 이어지고 있다. 박완서 작가 4주기에 맞춰 발간된 그의 초기 산문집 일곱 권도 그렇게 작지만 진심 어린 마음을 담고 있다.
더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는 작가 박완서는 소설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산문들도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7년 평민사에서 출간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시작으로 박완서 작가는 꾸준히 산문집을 출간했다. 각각의 책에는 그의 작품 이면에 숨겨진 인간 박완서의 삶과 어머니이자 아내,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이 오롯이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소설과는 또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한다.
문학동네에서 이번에 출간된 박완서 산문집은 그의 첫 산문집을 포함한 초기 산문집 일곱 권이다. 1977년 출간된 첫 산문집을 시작으로 1990년까지 박완서 작가가 펴낸 것으로서, 초판 당시의 원본을 바탕으로 중복되는 글을 추리고 재편집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각각의 제목은 1권 『쑥스러운 고백』, 2권 『나의 만년필』, 3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4권 『살아 있는 날의 소망』, 5권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6권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 7권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이다. 당시와 한글 맞춤법이 많이 바뀌어 현재의 맞춤법에 따라 수정을 하였지만, 박완서 작가 특유의 입말을 생생하게 살리기 위해 다양한 표현들은 그대로 살렸다. 그러나 수록된 산문에서도 드러나거니와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바른 말 쓰기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작가인지라 4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을뿐더러 그 시간의 차이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수필가가 일곱 권의 산문집이 새롭게 독자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출간 과정을 함께했다.
한편, 각각의 표지를 장식하는 이미지들은 이병률 시인과 박완서 작가의 손녀 김지상씨가 사진으로 찍은 박완서 작가의 유품이다. 이로써 안에 담긴 내용뿐 아니라 새로 차려입은 새옷에 담긴 그 의미까지 더욱 풍성해졌다.
무엇보다 이번 일곱 권의 산문집이 반가운 이유는,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에 놓인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 책을 통해 마치 박완서 작가가 살아 있는 목소리로 위로를 전하는 것 같아서가 아닐까.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작가의 생생한 경험담과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바라보는 냉철한 눈, 작가로서 또는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가지는 소소한 일상에서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일곱 권의 산문집은, 길게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짧게는 2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2015년 현재에도 유효할 뿐 아니라 여전히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 박완서 산문집 5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왜 이렇게 피차 외로운 신세끼리 따로따로 노는 걸까”
박완서 산문집 5권은 1985년 출간된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를 재편집하여 같은 제목으로 펴낸 것이다. 이 무렵 아파트로 이사한 작가는 여러 글에서 아파트 분양과 관련한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한옥에서 아파트로의 변화가 단지 주거환경만의 변화가 아님을, 그 속에서 퇴색되고 상처받는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가 생생한 일화를 통해 보여진다.
한편, 박완서 작가가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로 여성문제를 들 수가 있는데,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반성과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표제작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소위 팔자 좋은 여자들의 허위를 꼬집는 과감한 발언은 여성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반의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일침으로 읽을 수 있다.
눈이 피곤할 때나 할 일이 없어 심심할 때 창밖을 보면 멀리 성남 쪽의 산들이 바라보였다. 공기가 자욱해서 가까운 산만 보일 적도 있었고, 산 넘어 산, 그 산 넘어 또 산까지 보일 만큼 공기가 투명한 날도 있었다. 창가에서 먼 산을 볼 수 있다는 건 나에게 큰 위안이었다. 그러나 길가로 면한 얼마 안 되는 공터에까지 아파트가 들어섬으로써 나의 창가의 이런 위안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내 창가에서 볼 수 있는 건 온통 아파트뿐이다. 앞에도 좌우에도 멀리에도 가까이에도 첩첩한 아파트의 숲이다. 어떤 때는 내 눈에 그게 엄청난 돈더미로 보인다. 저건 1억 원 뭉치를 쌓아놓은 거, 저건 5천만 원 뭉치를 쌓아놓은 거, 하는 식으로 곱셈을 하다보면 머릿속에서 0이 수도 없이 새끼를 치고 혼란을 일으켜 도저히 감당을 못하게 된다. 그런 계산이야말로 사람의 머리가 할 짓이 아니라 전자계산기라는 그 앙증맞고 요망한 기계나 할 일이란 생각이 절로 난다. _「잃어버린 우리 동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