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 않은 질문, 뻔하지 않은 대답 속에서
진정한 ‘위로’를 발견하다
대한민국 1퍼센트라 불리는, 이른바 성공적인 엘리트 코스를 밝아온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와 10대 시절 《네 멋대로 해라》를 출간하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자칭 집도 절도 빽도 없는 도시빈민이자 비정규직 노동자 에세이스트 김현진. 두 사람이 뜻밖의 책을 펴냈다. 이메일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서로를 알게 된, 겹치는 데라고는 전혀 없는 30대 ‘날백수’와 멋스러운 70대 노교수는 네 계절 동안 32통이나 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 편지들 안에는 이 시대 ‘청춘’을 둘러싼 거대한 사회담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 반대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길을 걸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혹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느꼈던 감정의 흐름들, 내면에 꼭꼭 숨겨놓았지만 빙산의 일각처럼 그 작은 편린만 종종 드러나곤 했던 아픈 상처들, 일상에서 문득 발견하는 소중한 깨달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른다.
사소해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이야기
이 책의 저자 김현진은 만만치 않은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삶의 어려움을 똑같이 체감하는 또 하나의 ‘청춘’이다. “누구도 탓할 수 없이 제 손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만들어왔다”고 자책하던 그에게 라종일 교수와의 만남은 어쩌면 ‘평탄치 못한 삶’에서 벗어날 새로운 돌파구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김현진이 찾은 돌파구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만나고 싶은 기회이자 계기이기도 할 것이다. 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픔, 상처, 진심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상대가 있다는 것, 그가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아무 편견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다는 것, 그리하여 그와 주고받은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는 것, 이것이 아주 개인적인 편지를 ‘책’이라는 물성에 담아 모두에게 공개하는 이유다. 김현진은 이렇게 말한다.
“궁지에 몰린 쥐가 도망칠 틈새를 찾아내듯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구원에 매달렸다. 그것이 선생님과의 서신 교환이었다. … 선생님은 몇 번이나 이 기록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을 망설이셨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이 충만한 이 기록들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선생님의 답장들을 나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아픔들은 누구라도 한 번쯤 지나치게 되는 보편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선생님의 답신들은 흔히 접하기 어려운 혜안과 어렵지 않은 스마트함을 동시에 지닌 것들이었다.”(김현진 [들어가며])
‘멘토’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주는 공감과 위로
그렇다면 대화 상대인 라종일 교수는 어떨까? 그의 말은 어떤 것을 품고 있기에 이 시대 청춘에게 ‘혜안’과 ‘스마트한 위로’를 주는 걸까? 김현진은 “이 시대의 멘토라는 사람들은 얼마나 뻔한 이야기만 하는지. 그래서 나는 라 선생님께 매달리게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현진의 말대로 라종일 교수는 뻔한 이야기, 어설픈 조언이나 충고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장 현실적이고 어쩌면 뼈아플 수 있는, 그래서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전한다. 그렇기에 40여 년이라는 차이가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공감과 이해 그리고 위로가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들려주어야만 할 것 같은 흔히 말하는 ‘멘토’로서가 아닌, 더 나아가 인생을 좀더 경험한 선배로서가 아닌, 똑같은 인간으로서 상대를 대할 때 우리는 그의 말에서 힘과 깨달음을 얻는다. 라종일 교수는 마지막 편지에서 김현진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 역시 큰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처음 현진이 글을 주고받자고 제안했을 때는 물론 그것이 책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현진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려웠던 상황에서 저와 글을 주고받은 것이 현진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글을 보면서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현진에게 밀려서(?) 신통치 않은 답을 쓰면서 어쩌면 저도 현진 못지않게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본문 248쪽)
“웃는다면, 웃을 수 있다면 주변의 누추함마저도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라종일 교수만의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잔잔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 에너지에서 나오는 사려 깊은 나눔과 소통, 이것이 이 시대 ‘청춘’들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가 아닐까.